체 게바라의 쿠바혁명, 분단 된 남녘에서 전태일 노동해방, 평화통일로 가능한가

프레스아리랑 | 입력 : 2020/08/05 [02:12]

 

  평화시장내의 전태일 동상 © 프레스아리랑



나는 《왜? 전태일인가?》를 왜? 쓰는가?

 
나는 1955년에 태어났다. 1975년에 치과대학에 들어갔고, 1985년에 치과 개업을 했다.
 
유신 독재가 한창일 때 대학생활을 했고, 한국 자본주의가 막 팽창하던 무렵에 경제활동을 시작했다. 사람은 사회제도가 만든 환경에 익숙하게 마련이지만, 유신의 독재체재와 자본주의의 약육강식을 강요하는 경제체제가 나에게는 무언가 개운치 않았다.
 
나는 그 당시 정치와 경제제도에 격렬하게 저항하지는 않았지만, 정치와 무관해 보이는 치과대학 생활과 치과의사란 돈벌이가 비교적 수월한 ‘쁘띠 부르주아’의 생활에 물음표를 던졌다. 나를 찝찝하게 한 현실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책을 얼마간 읽은 편이다. 
 
책을 읽고 깨달은 바에 따라 사회 인습과 관성에 맹목적이지 않고 권력에 굴종 않고 이성적으로 성찰하고 판단하는 힘이 생겼다. 대학생활을 하면서 강압적인 정치 현실에 저항하는 의식을 키운 책은 이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였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부익부, 빈익빈’ 경제 현실에서 약자를 위한 연민의 소중함을 깨우친 책이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이었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다. 내일 지구에 대홍수가 닥쳐 내게 ‘노아의 방주’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나는 이 책 두 권만은 반드시 가지고 가리라.
 
<전환시대의 논리>란 책을 통해 ‘베트남전쟁’의 진실을 마주 보면서 우리사회를 숨 막히게 한 반공이란 허위의식을 걷어내고 한반도 남북분단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게 됐다. <전태일 평전>을 읽고는 소수가 누리는 부유함과 안락함에는 다수의 희생과 고통이 반드시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걸 깨달았다.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건치)’는 2000년부터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이 저지른 베트남의 학살 피해 지역을 찾아 의료 활동을 통해 우리의 베트남전 참전 사죄운동을 지금까지 해마다 하고 있다. 나는 2001년부터 참가했고, 그동안  베트남에 28번 다녀왔다.
 
나는 의료 활동보다는 베트남전쟁의 진실을 찾기 위해 베트남 현대사에 더 많은 관심이 많아 베트남에서 역사 기행을 많이 했다. 그래서 좌우 모든 인민에게 존경받는 호치민을 통해 식민지와 분단의 체제를 극복한 베트남 혁명이 무엇인가를 어렴풋이 깨우쳤다. 
 
베트남을 지배한 프랑스 역사, 특히 프랑스 혁명을 많이 공부했다. 베트남과 가장 가까이 지낸 혁명가 체 게바라의 나라 쿠바도 방문하여 쿠바 혁명도 공부했다.
 
덕분에 프랑스와 미국과 같은 거대한 제국주의와 제국주의에 고통스럽게 착취당하는 식민지 사이에 발생하는 모순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거시적인 시각을 얻었다. 나는 한국인이며 현재 외세가 분단한 땅인 남한에서 살고 있다. 
 
이 안타까움 때문에 나는 외세를 극복하고 혁명을 성취한 베트남이나 쿠바의 역사에 관한 많은 글을 썼다. 그런 내 글에 “제 나라 역사도 제대로 모르는 주제에 남 나라 역사는”이라는 지적을 뼈아프지만 가장 깊이 새겨들었다. 
 
그래서 정당한 비판에 대해 최선의 방어를 준비해야만 했다. 그 최선의 준비란 바로 전태일 정신을 바로 알기였다. 
 
나는 2010년 이후 베트남 혁명에 대해 감을 잡고 난 뒤 전태일을 보기 시작했다.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프랑스에 저항한 식민지 투쟁과 미국의 제국주의 저항한 베트남전쟁 수행 그 자체가 위대한 혁명이었다. 
 
이 혁명을 이끈 지도자는 호치민이었다. “민족의 독립과 자유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란 의지로 좌우를 막론하고 전 인민을 결집시켰다. 
 
독립이란 민족적 염원과 자유란 인간의 존엄을 위해 일생을 바친 호치민의 웅혼한 인간적 위엄을 칸트의 용어를 빌어 말하자면 ‘숭고(崇高)함’이었다. 나는 위대한 지도자 호치민을 통해 ‘숭고’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칸트에 따르면 숭고함이란 크나큰 고통을 겪은 정신만이 지니는 정신의 깊은 깊이와 넓은 크기를 말한다. 다시 말해 크나큰 고통을 겪지 않은 정신은 숭고함을 나타낼 수 없다.
 
가난한 농업국가인 베트남은 자신들보다 1천배 이상의 힘을 가진 인류 최대의 산업국가 미국과 약 30년에 걸친 전쟁을 치렀다. 미군이 약 6만 명 죽은 데 비해 3∼4백만 이상이 되는 베트남 인민이 전쟁으로 죽었고, 전 국토는 미국의 폭격으로 석기시대로 돌아간 듯 황폐해졌다. 
 
베트남 인민은 그런 고통을 겪고 나서 최후의 승리를 쟁취했다. 제국주의 침략에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은 베트남 인민의 정신 승리를 칸트는 숭고하다고 했을 것이다.
 
2018년에 나는 쿠바를 방문하고 2여년 쿠바의 혁명을 공부했다. 쿠바 혁명의 상징 인물은 체 게바라다. 
 
부유한 집안 출신인 아르헨티나인 체 게바라는 의과대학생일 때 남미 대륙 일대를 여행한 적이 있다. 체 게바라가 본 것은 자신의 땅을 빼앗기고 비참하게 사는 남미 대륙 원주민들의 삶이었다. 
 
체 게바라는 안락한 의사 생활을 포기하고 거친 혁명의 길을 선택했다. 카스트로를 만난 뒤 쿠바 혁명에 뛰어들어 혁명의 승리를 맛보았다. 
 
체 게바라는 혁명이 성공한 쿠바에서 고위직 생활을 버리고 쿠바 민중보다 더 비참한 아프리카와 남미 민중을 위하여 투쟁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인류의 가장 밑바닥 민중에 대한 연민을 실천하기 위해 목숨마저 던진 체 게바라의 정신을 칸트는 역시 숭고하다고 했을 것이다.
 
작년에서야 비로소 내 관심 주제를 우리 전태일의 삶으로 옮겼다. 전태일에 관한 한 충분하고도 가장 훌륭한 자료는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이다. 
 
이를 테면 전태일 전기에 있어 경전(經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의 복음서와 다를 바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고마운 분의 도움으로 몇 몇 자료를 더 찾았으나 <전태일 평전>의 범위를 크게 넘어서지는 못했다. 애달픈 젊은이의 삶과 죽음을 그토록 의미 있고 생생하게 그려낸 조영래 변호사의 글은 이제 고전(古典)으로 자리매김 했다고 볼 수 있다.
 
복음서나 대장경을 시대 환경에 따라 해석하는 것이 신학이고, 논어를 다시 해석하는 것이 주자학이 아니겠는가. 예를 들어 같은 성경을 해석하기에 따라 신앙 행동은 천차만별이다. 
 
태극기 부대 사이비 목사의 성경과 민족통일을 위해 헌신하신 문익환 목사의 성경은 관점이 확연히 다를 것이다. 아니 어쩌면 사이비들이 천박한 신앙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성경을 왜곡한다고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불경도 마찬가지다.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온갖 적폐를 양산한 조계종 권승(권력을 쫓는 땡중)의 불경과 불교계와 유착한 정치권력의 적폐청산에 온 힘을 다하는 명진 스님의 불경의 관점도 하늘과 땅 차이일 것이다. 이 글은 보잘 것 없지만 내 나름으로 해석한 <전태일 평전>의 관점인데 어떤 평가를 받을지 솔직히 궁금하다.
 
전태일 정신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어린 여성 노동자를 향한 연민이었다.” ‘어린’, ‘여성’, ‘노동자’란 세 단어의 조합은 사회에서 힘없고 무시당하고 천대받는 모든 가난한 약자를 상징한다. 
 
비렁뱅이로 무시당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무지렁이로 천대받던 노동자가 사회의 약자에게 보낸 ‘연민’을 칸트는 분명 숭고하다고 했을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구체적인 전태일 삶의 ‘의미’를 추적해 전태일의 숭고함을 나타내려고 노력했다.
 
자신의 처지도 비루한데도 약자만 보면 나눔을 실천한 전태일의 행위는 예수의 오병이어 정신을 연상케 한다. 17세의 청년 노동자가 ‘어린’ ‘여성’ ‘노동자’가 겪는 고통을 통해 천박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바로 꿰뚫어 보았다는 것은 놀랄만한 천재적인 직관이었다.
 
전태일의 장엄한 분신을 베트남 인민은 물론 전 세계인에게 충격을 준 베트남 꽝득 스님의 분신과 일맥상통하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전태일의 약자에 대한 연민은 20세기 양심이라 부르는 대석학 버트런드 러셀의 인류애만큼이나 숭고했다.
 
고통 받는 약자를 위해 자기 몸을 불사른 용기는 히틀러를 암살하려다 사형당한 20세기 신학의 천재 본회퍼의 용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가난한 전태일이 4살 연상이며 부자인 업소 주인의 처제를 짝사랑했다. 
 
나이와 가정환경 차이로 애끓은 사랑을 포기하며 자신의 처지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빗대면서 괴테의 문학에 심취했다. 동시에 김소월의 시를 비롯한 몇몇 유명한 세계적인 서정 시인을 섭렵했다. 
 
그런 독서 습관 덕분에 글쓰기 재능이 빼어날 수 있었다. 나는 이렇게 전태일 삶 가운데 몇몇 사례를 통하여 전태일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세계사적 인물들의 유산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다는 것을 밝히고 싶다.
 
전태일을 “투쟁·단결”의 상징인 노동운동가 또는 노동 투사로 한정 짓는 것은 전태일의 정신적 크기를 과소평가한다고 생각한다. 전태일의 숭고한 연민 정신은 혁명의 풍운아 체 게바라의 인류애적인 혁명 정신과 충분히 비교할 수 있다.
 
내 글을 읽은 분이 여기에 동의를 하지 않는다면, 이는 전태일의 품성 문제가 아니라 내 부족한 글 표현력 때문이다.
 
<건치 송필경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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