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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싶은 얼굴..과 현미여 안녕

노래의 사회사와 미학

프레스아리랑 | 기사입력 2023/04/24 [21:26]

보고싶은 얼굴..과 현미여 안녕

노래의 사회사와 미학

프레스아리랑 | 입력 : 2023/04/24 [21:26]

보고싶은 얼굴..과 현미여 안녕

ㅡ노래의 사회사와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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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보쿰에서 공부하던 김교수 십팔번이 <보고싶은 일굴>이었다. 키가 큰, 하얀 귀족적이며 이지적 얼굴의 그가 그 노래를 늘 눈을 지긋히 감고 불렀다. 그의 젖어오는 눈과 가슴이 느껴져 와서
보기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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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삶의 길에 푸르름이 있을 때에, 열정과 아픔이 피어날 때에, 슬픔과 그리움이 뭉게구름처럼 일고 흐를 때에 노래들이 있었다.
새 노래도 좋지만 우리 삶의 가도에, 무수한 선로처럼 미로와 골목으로 뻗어가고 흐르는 강물처럼 나와 우리들의 지난 옛 노래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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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는 가수 현미가 졌다. 벌써 잠시 시간이 흐르니까 그처럼 뉴스를 사로잡던 현미의 시간도 지나가고 결국 서서히 잊혀질 것이다. 봄은 흐드러지고 꽃은 피어나는데 언제나 건강, 씩씩하게 살고 보이던 젊은 할머니 가수 현미가 불현듯 떠나갔다. 때로는 너무 씩씩하게 느껴지는 면도 있었지만 인간적으로는 며러가지로 애잔한 삶의 주인공의 면모가 있었다고 본다.

아주 어린 덕성여대 2학년 때 미팔군의 쇼에서 일약 가수로 우연히 발탁된 후 현미는 타고는 빼어난 앨토와 소울풍 가창력으로 한시대를 주름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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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그녀의 전성기이던 60년대 70년대 만이 아닌 그녀는 그녀의 삶이 마감되던 80대 중반까지도 놀라운 가창력과 성량과 에너지를 잃지 않고 활약했다. 그러나 그러한 가수로서의 화려한 삶의 이면에는 애처러움과 슬픔이 의외로 깃들어 있던 삶이었다.

그 어린 나이에 미팔군의 화려한 가수로 활동하면서 맺어진 작곡가겸 색스폰 주자인 이봉조와의 만남이 행복한 비극이었다. 그녀의 나이 22세에 불과 26세인 밴드마스터 이봉조가 자식을 둘이나 둔 유부남인 몰랐던 상태에서 현미의 첫사랑이자 불운의 만남이 운명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봉조는 이같은 사실을 숨기고 현미와 동거하였다가 훗날 현미가 모든 사실을 알고 단호하게 헤어질 것을 말하자 술을 마시고 세간을 때려부수면서 난동을 부린 상태에서 맨몸으로 아이들과 더불어 집을 나와 별거를 하였다 한다. 그들이 다시 만났을 때에는 이봉조가 작곡가와 색스포니스트의 화려한 전성기가 어언 끝나고 홀로 지내며 탕진한 몸과 병든 상태로 내리막길을 쓸쓸하게 살아갈 때에 현미를 찾았고, 이 애처러운 모습을 현미가 목도하고 다시 모시겠다고 그렇게 말하며 어렵게 작심하였으나 이봉조는 곧 바로 짧은 나이에 삶을 마감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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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을 고향으로 태어난 현미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서 한달 반인지를 오직 두발로 걸어서 평양에서 대구까지 피난길을 갔었다는 것도 우리 민족의 비극적인 역사의 한 페이지와 잊을 수 없는 삶과 사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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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년의 날에 오직 라디오만이 전북의 수부이지만 지방 도시인 내 고향 전주의 외롭고 쓸쓸하고 외진 삶을  벗어난 세상을 이어주던 그 라디오로 나는 화려하고 먼 서울이나 넓은 세상을 느끼고 호흡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신문이 문자로 그런 갈증을 다소는 달래주었지만 보다 감성적인 청각을 통하여 멀고 넓은 우물안 좁은 삶의 범주와 울타리를 넘어서게 하던 라디오는 매우 정겨운 세상과의 유일한 통로였을지도 모른다.

이들과는 또 다른 업그레이드 되는 차원이 열려지고 가능해서 오늘의 나를 형성하고 이루었을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인 고교생들에게는 그리 쉽지는 않은 세계였겠으나 나에게는 최고의 최선의 크고 높고 깊은 세계의 창과 문을 여는 은총과 계기였다. 바로 사상계라는
잡지였다. 오늘은 이것은 아끼기로 하자.

유난히 마음에 깊은 우물과도 같은 슬픔과 외로움이 깊었던 편이었던 나는 때문에 감성적으로도 유난히 예민한 편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의 소유물건은 물론 아닌 집안의 라디오로도 그것에서 흘러나오는 성장기의 모든 노래들은 별 어려움도 없이 너무 자연스럽게 입력이 되고 깊이 각인되었다. 특히 매우 총기와 기억력이 뛰어나다고 자타가 공인하던 소년기에 나를 바람처럼 스쳐간 모든 이 땅의 뭇 가요들이나 쟝르를 초월한 음악들은 나의 정신과 존재에 스며들어 시내가 되고 강이 되고 나와 우리를 형성하는 그 어떤 존재의 요소들이 되었을 것이며 쉽게 감지하지 못할 나의 시의 요소들로 흐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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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냇킹콜이 부른 원곡도 찾아 들어보았지만 그러나 나의 감각으로는 여성 앨토로 부르는 현미의 밤안개가 훨씬 더 매력적이고 파고드는 노래였다. 원래 건축학도이던 이봉조도 개인적인 삶이야 좀 지나치게 문제였을지라도 그의 음악성 하나는 나름대로 탁월한 대중음악가였다.

수많은 빼어난 그의 작곡 노래들이 있지만 <보고 싶은 얼굴>과 <무인도> 같은 노래들은 얼마나 좋은 노래들인가 말이다. 특히 나에게는 보고싶은 얼굴은 서정적인 그리움으로 그리고 무인도는 존재적인 고독과 쓸쓸함으로 왜 그리 나의 이십대의 나날에 많이 홀로 불렀는지 모른다. 원래는 <무인도>도 이봉조가 현미를 위해서 만든 곡이라 했다. 그러나 해외에서의 경연에 앨토인 현미보다 고음의 가수가 어필한다는 차원에서 이 무인도가 결국 김추자나 정훈희 차지가 된지 모르지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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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이봉조가 현미를 처음 만나면서 현미의 음악적 자질과 보컬적인 매력을 소울풍으로 파악하고 꽃피게 한 이봉조의 탁월한 면이 있었다고 보인다. 그 점을 인간적인 불우한 만남이었을지 모르지만 현미가 가수로서는 이봉조를 만난 것이 행운이고 축복이었다고 했다. 대형 국민 여가수로 한시대를 풍미한 패티 김보다도 나는 개인적으로는 현미가 더 좋았다.
그녀가 가수가 되기 전에 원래는 무용을 하면서도 자신의 앨토로 즐겨불렀다는 <대니 보이>...가 현미의 애창곡으로 남아있었어야 하는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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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 떠서 세계를 놀라게 하는 소위 K 팝의 오늘의 주인공들 보다 그 원류가 되고 그 토대가 된 탁월한 이 땅의 불우하고 어려웠던 시대의 참된 뮤지션들- 그들이 클라식음악이던 대중음악이던간에 쟝르를 불문하고 그들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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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신중현

나는 개인적으로는 전오승 작곡들이 좋았고 그의 동생으로 가수가 되어 부른 나애심의 음전하고 깊은 노래들이 좋았다. 송민도도 좋았다. 어쩌면 조금 포근하고 깊은 음색인 그들의 연장선상에 현미가 소울풍으로 이어진다고 보여진다. 현미와 비슷한 음색으로 잠시 반짝했다가 사라진 <보슬비 오는 거리>의 성재희가 있었다.
그리고 60-70년대에 정말 천재적으로 우리 가락의 창조성을 보인 신중현은 나는 멋지고 훌륭한 대중음악가 작곡가로 존경한다. 그의 사이키델릭한 현란하고 자유로운 가락... 그리고 추구하던 한국적인 가락...얼마나 멋진가. 거기에서 봄비의 박인수와 미련의 장현 및 김추자와 김정미 펄 시스터즈들이 탄생하였다. 그의 음악의 태반에서 그의 아들인 시나위의 신대철이 나왔다. 또한 그는 단순한 적빈의 상태의 삶에서 기타를 잡고 미8군에서 빼어난 연주가로 그리고 드디어 한국의 대표적인 작곡자로 부상하고 화려한 시절을 구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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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야만의 시대에 박정희 찬가를 만들라는 당국과 정보부의 주문을 모든 일신상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단호히 거절한 작은 거인이었다. 그리고 심지어 그는 그 거부로 인하여 우리 사회에서 모든 것을 일거에 잃어버리고 제대로 활동하지 못한 상실의 시대와 계절을 살아아야 했다. 그의 인생과 음악가의 황금기를 그는 안타깝게 그렇게 의연히 보냈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의 탁월한 음악성을 알아본 일본인들이 신중현에게 백지수표를 내밀면서 유혹을 하고 일본에서 활동할 것을 제안했지만 신중현은 그러한 제안과 조건도 단호히 거부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들으면서 한 때 나는 인간 신중현을 직접 만나 그의 삶을 글로 책으로 만들고 싶은 그런 의욕도 깊게 내장한 시절이
있었다. 현실적으로는 전혀 불발탄이 되고야 말았지만 말이다.

아, 조금 다른 대형 가수이자 작곡도 왕성히 하는 나훈아ㅡ본명 최홍기ㅡ도
노래 몇곡에 거액을 준다는 삼성가의
제안과 초대를 신중현처럼 단호히 완강히 거부했었던 철학과 최씨의 아름다운 고집이 나름 음악의 결은 다르지만 자신의 노래를 꽃피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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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김민기

신중현과는 전혀 다를지라도 우리의 김민기도 세계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는 천재적인 우리의 뮤지션이다. 그의 노래로 낮고 깊은 노래로 우리들은 70년대 80년대를 견뎌내고 위로받고 노래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미술에서 시작한 미술학도였으면서 도깨비 두마리를 상징한다는 도비두라는 뜌엣으로 청개구리에서 자신을 드러내면서 어느 날 <가을편지> 최양숙의 오빠인 최경식 피디의 도움으로 <아침이슬>이라는 우리 시대의 송가- 물론 지금은 조금 어두운 노래가 되어버렸을지 모르지만-로 우리들의 영웅이 되었다. 그리고 그 고독하며 우수어린 영웅은 일반적인 소위 딴따라의 전형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매우 철학적이며 존재론적인 그런 삶을 살았다. 경기고와 서울대 출신인 김민기가 군대에 끌려갔다가 나와 농촌현장에서 머슴살이를 자청해서 하고 <공장의 불빛>들의 노래들을 만들어 노동현장의 아름다운 노래들을 공급하고 그런 일로 고초를 당하고 그렇게 열심히 살았다. 얼마나 멋진 김민기인가. 김민기의 <강변에서>와 <바다> <아름다운 사람>은 한 시대 나와 우리를 지탱케 한 노래였다. 나의 벗 고 김경남 목사는 서울법대생 운동권 시절에 못 이루는
짝사랑 앞에서 떨리는 굵은 황토색 바이브레이션으로 김민기의 <누가 보았을까 아픈 이 마음을...> 애절하게
부르곤 했다. 가슴을 쥐어 짜듯이 아픔을
노래하던 예쁘던 벗도 스러져 5.18 묘지에 고요히 누워있다.
그런 김민기를 원주 박경리 문학관에서 만났는데 너무 술에 빠진 것 같이 보여 안타까웠다. 락커 전인권은 나도 직접
있있던 대학로의 겨울 송년 컨서트에서
자신의 존경했던 롤 모델이 김민기라 고백해서 좌중 청중들 모두 아름다운
가벼운 충격상태가 되기도 했었다. 아하 ㅡ그랬었구나..

ㅡ송창식

송창식 또한 결코 단순한 소위 딴따라 가수가 아니다. 일찌기 어린 음악적 천재였던 송창식이 사실상 고아로 금란새와 동기로 서울예고를 다니면서도 너무 불우하고 가난한 외로운 처지에서 렛슨비가 없어 학교를 낙제당하고 중퇴할 수 밖에 없던 그런 불우에서도 그는 밝은 심성으로 어느날 무교동의 세시봉을 통하여 화려하게 가수로 성공하게 된다. 윤형주와 뜌엣을 결성하여 십대소녀들의 우상이 되고 그러나 진지한 그의 체질과 음악성은 팝송과 번안곡 차원에서 만족하지 않고 독자적이며 토속적인 우리의 가락과 음악에 천착하여 윤형주와도 결별하고 집중하면서 미당의 시를 작곡한 <푸르른 날> 이래 너무도 슬픔 자체인  <눈길>과 우리의 아름다운 노래들을 연달아 쏟아내었다.

송창식은 김민기가 <공장의 불빛>을 제작할 때에 비밀리에 그당시의 삼엄한 중앙정보부와 사찰의 눈을 피하여 송창식의 녹음실을 빌려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송창식은 원래는 의식있는 운동권쪽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이를 수락하였고 후에 많은 고초를 당했을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 내색도 내지 않고 김민기에게 늘 밝고 껄껄거렸다는 것으로 김민기 스스로가 '송창식 선배는 대인이다'라고 표현하였다 한다. 수많은 송창식의 노래들 중에서도 나는 <새는><우리는><철지난 바닷가>영성 깊은<선운사>등을 좋아한다.

ㅡ정태춘

정태춘 또한 나중에는 스스로 운동권의 전사(?)같은 면모도 보였고 그 또한 의미가 있다고 보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는 그의 초기의 소박한 서정적인 노래들이 너무도 좋았다. 나중에는 가사를 바꾸었으나 나는 그의 처음에 만든 <시인의 마을>을 단연 더 좋아하는 편이다. 독일 유학에서 잠시 돌아와 후배의 집에서 테이프로 들은 한국의 바이즈인 그의 부인 ㅡ 청아하고 깊은 박은옥의 음색과 듀엣으로 부른 <봉숭아>는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조금 어두운 아버지의 죽음을 노래한 <사망부가>는 상업성이나 대중성으로 보면 좀 그럴지 모르지만 나는 탁월한 우리 가락과 죽음에의 아름다운 노래로 높이 친다. 슬프면서도 ㅡ빠르고 흥겨운 그것을 이겨내는 우리 가락을 그는 <사망부가> 에서 추구하고 만들어냈다. 아, 그의 <서해에서>를 한없이 고즈넉한 눈길과 목소리로 나직하게 부르던 철암 광부 아버지의 아들이자 나의 착한 심성의 제자 성희는 이른 나이에 새처럼 떠나갔구나.
정태춘, 그의 <떠나가는 배>는 우리의 젊은 날, 정말 새로운 항구와 바다로 출항하고 픈 우리들의 뜨거운 열망의 송가였을 것이다.

ㅡ이영훈

개인적으로는 송창식의 뒤를 이어 이문세를 대단한 히트 가수로 만들어 준 작곡가 이영훈의 음악성을 대단히 좋아한다. 원래 그 또한 클라식의 기반을 쌓은 위에서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우리 시대의 <가로수 그늘아래서면> 등 무척 세련되며 서정적인 명곡들을 만들어 냈다. <슬픈 인연>에 이어 어느 날 우연히 <옛사랑>의 노래와 음률을 들었을 때에 그 아련한 슬픔으로 젖어오던 포근한 감동을 결코 잊지 못한다.

ㅡ조동진

조동진의 우수어린 발라드 명곡들도 우리 시대의 불란서의 샹송 못지 않은 음악적 산물이자 창조였다고 본다. 그의 <행복한 사람><울고있나요>그리고 <나뭇잎 사이로>와  <겨울비> <작은배> 그리고 마침내 <제비꽃>에 이르면
그는 어느덧 한 사람의 음악가에서 우수어린 가객이며 철학자며 시인의 면모로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그가 요새로는 젊은 나이에 그가 간 것을 매우 애석해한다. 그는 한국 포크의 대부였다. 그가 안타깝게 먼저 젊은 나이에 간 후에 나는 기회가 있는대로 그를 알리면서 그의 노래들과 <제비꽃>들을 열심히 노래부르며 보급하려 나름 노력했다. 이 노래는 한 여성이 소녀에서 여인으로 성장하고 삶의 애환을 거치면서 성숙하는 그 과정과 일생을 시적으로 노래하였다. 많은 좋은 작사가들이나 작사도 겸하는 작곡가들은 가히 시인들이다. 당연히 조동진도 나름 시집도 낸 음악을 하는 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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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윈한 방랑의 로만티스트 히피,
한대수의 기갈어린 <물 좀 주소>고요한 갈구의 찬가 <행복의 나라로>에서 '물결 건너 편에...<바람과 나>의 마치 노장 도인과 선사풍의 노래들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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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분히 의도적인 조(중동)의 상업주의, 대중적 선정성을 노린 이른바 트로트 열풍에 우려한다. 어린 날과 성장기에 마땅히 소박한 동요와 순수한 감성, 혹은 가곡적 아름다움과 시의 감동 또한 인간의 풍부하고 귀한 감성과 그 배양을 위하여 매우 필수적인 면이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말 어린 꼬마들 까지도 온통 성인 트로트 열풍에 젖어 있는 듯 한 현상은 상당한 우려와 분노도 느끼게 하는 현실이 아닐 수 없다.
K팝도 그 발전도 마땅히 과학에서도 실용과 응용과학만이 아닌 기초과학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바 처럼 묵직하고 깊은 저력과 토대를 필요로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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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소위 화려한 K팝을 만들은 그 전사- 앞의 역사를 일군 소중한 우리들의 음악가들을 다시 떠올리며 존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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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돌이나 김의철이나 양희은이 많이 부른 이주원도 둘다섯 오세복도 최백호도 멋진 작곡가들이다.
<모란동백>의 이제하 시인도 멋진 작곡가며 가객이시구나.

원래는 화가 지망이던 최백호는 그의 삶 때문인지 때론 과도한 청승끼도 있지만 <입영전야> 로 부터 슬픈 발라드 들에 이어  드디어 <부산에 가면>의 독백의 깊은 웅얼거림인지 아득한 안갯빛 바다의 적막한 그리움의 노래인지..알 수 없는 마침내 그 경지는 깊어지고야 말았다.

서정과 철학과 깊은 내성이 있는 노래들이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고 향기롭게 한다. 운동가요로 문승현 문대현 한길을 지향하며 가는 이지상 등도 좋았다. <산하>의 김병준의 서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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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나도 참여한 지난 토요일 촛불집회에서 멋진 하일라이트 중의 하나는 정통 성악가들이 부른 한돌이 작곡하고 서유석 ㅡ그는 몽양 여운형의 동지이던 이만규의 외손 ㅡ이 부른 <홀로 아리랑>과 양희은이 부른 김민기의 <상록수>였다. 머리가 긴 성악가는 한돌의 노래를 더불어 꼭 이 광장의 뜨거운 눈빛들과 가슴으로 부르고 싶었다고 열정적으로 말했다. 매우 반가운 소리였다.
편곡도 신선하고 신명 넘치는 밴드의 연주도 좋았다.
나도 거리에 앉은 채로 모처럼 소리 높여 뜨겁게  노래했다. 노래하며 춤을 추고 싶었다. 신친일파 엉터리 대통령 윤석열과 그 웃기지도 않는 한심한 정권이 우리의 주체성과 주귄과 자존심을 심히 상하게 하는, 정말 이러다가 미국의 비호나 중립적 관망 속에 일본 자위대가  어느날 독도라도 공격할 수도 있을지도 모를 개연성이 심각하게 우려되는 마당에 멋진 성악가의 뜻과 발심이 한돌의 노래로 우리의 광장과 거리에 뜨거운 해일이 넘쳐 파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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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속으로는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도 기죽지 않고 백세까지도 당당하고 씩씩하게 살것 같이 보이던 현미가 갔다. 그녀의 명복을 기원하면서 또 누가 어떤 가수가 그녀 비슷한 깊은 성량과 음색으로 삶을 노래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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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노래의 주인공들과 노래들을 떠올려 본다.
나와 우리의 추억 속에 어드메 깃들고 머물어 살고있는
<보고싶은 얼굴...>의 주인공들과 잊을 수 없는 정든 옛노래의 가락과 더불어...

 

 

                                                                                            최자웅(신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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