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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연재)『민족수난기의 가요들을 더듬어』1

민족수난기에 창작된 예술가요들을 더듬어

프레스아리랑 | 기사입력 2023/03/08 [17:51]

(도서연재)『민족수난기의 가요들을 더듬어』1

민족수난기에 창작된 예술가요들을 더듬어

프레스아리랑 | 입력 : 2023/03/08 [17:51]

 

 

1. 민족수난기에 창작된 예술가요들을 더듬어

 

  1) 예술가요의 토양 애국문화계몽가요

  2) 홍란파의 《봉선화》와 그의 가요들

 

  3) 예술가요의 발자취

 

1. 민족수난기에 창작된 예술가요들을 더듬어

 

예술가요는 1800년대중엽과 1900년대초에 창작되여 불리워지던 창가풍의 단조로운 가요형식에서 벗어나 음악을 보다 건전하고 예술적으로 발전시켜나가기 위하여 창작보급된 가요형식이다.

민족수난기에 창작된 예술가요는 노래의 형상에서 사람들의 정서적감정을 맑게 정화시켜주는 역할을 하여주었다.

예술가요는 빈터우에서 문득 생겨난것이 아니며 그 이전에 불리워진 애국문화계몽가요를 밑거름으로 하여 생겨 났다.

그러므로 아래에 애국문화계몽가요부터 먼저 언급해본다.

1) 예술가요의 토양 애국문화계몽가요

 

우리 나라에서의 초기 애국문화계몽가요는 1800년대말엽 개화사상을 가진 지식청년들이 평민대중들속에 들어가 문맹퇴치를 위한 사업에 앞장서면서 그로부터 많은 노래들이 창작보급되였다.

이 시기에 창작보급된 노래는 《한글풀이》이다.

《한글풀이》는 창가풍이 아니라 민요이다.

아래에 여러갈래의 《한글풀이》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세 작품을 몇줄씩 적어본다.

 

가갸거겨

가다 오다 만난 사랑 정깊으니 님이로다

거리구경을 하였더니 육날미투리 다 해져서 겨우

   겨우 돌아왔네

고교구규

고대광실 부러 말라 단칸 초가집이라도 맘 편하면

   락이로다

한강에다 다리를 놓고 한강교라 이름 짓고 대동강에

   다리 놓아 대동교라 이름짓자

규방아씨 어서 나와 문명개화 눈을 뜨자

나냐너녀

나귀등에다 몸을 싣고 팔도강산을 유람갈가

너와 나와 짝을 지어 백년해로를 하여보자

노뇨누뉴

노세노세 젊어서 놀다가 늙어지면 랑패로다

다댜더뎌

다닥다닥 붙었던 정이 덜컥덜컥 성을 내니 덧없이도

   뚝 떨어진다

도됴두듀

돌아온다 돌아와 양춘가절이 돌아온다

두루두루 늙은 몸도 마음 젊어 봄이로다

라랴러려

라씨네 외동딸 볼수록 곱구나

이랴이랴 소를 몰아 문전옥답을 갈아보자

(이하 생략 )

 

아래에 이와는 다른 《한글풀이》를 몇줄 더 적어본다.

 

가갸거겨

가이없는 이내 몸이 가이없이 되였구나

고교구규

고생하던 우리 님이 궁곤하기 짝이 없네

나냐너녀

나귀등에 솔질을 하여 순금안장을 지어 타고 팔도강

   산을 유람가자

노뇨누뉴

노세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 지면은 못 놀리라

다댜더뎌

다닥다닥 붙었던 정이 덧이 없이 뚝 떨어진다

도됴두듀

도장은 늙은 몸이 다시 젊지는 못하리라

(이하 생략)

※ 도장…리조때에 도조를 받아 관가나 궁중에 바치는 일을 맡아

     보던 관리를 의미함.

 

아래에 또 다른 《한글풀이》를 더 례로 든다.

 

(앞부분 생략)

아야어여

아가 아가 어서 커서 나라 부흥에

   힘써보자

오요우유

오고가는 로류춘색 저물었다 설어 말아

   명년 이때에 다시 온다

자쟈저져

자지 말고 공부를 하여 절대영웅 되여보자

조죠주쥬

조촐한 이내 몸이 주저할길 전혀 없다

차챠처쳐

기차도 타고 배도 타고 몇만리라도 나가를 볼가

초쵸추츄

초초한 이내 몸이 가련하기 짝이 없네

카캬커켜

칼날같은 내 성격에 무엇을 하여 살아볼가

코쿄쿠큐

콜콜 잠자지 말아 클클해서 못 보겠네

타탸터텨

타도 타관 먼먼길에 누구를 믿고 나 여기 왔나

토툐투튜

토실토실 곱던 얼굴 투실투실 다 늙었다

파퍄퍼펴

파란 많은 이내 몸 점포 놓고 살아볼가

포표푸퓨

포구마다 머무는 배야 문명개화를 싣고 오라

하햐허혀

하여보세 하여보세 천하사를 하여보세

호효후휴

호호탕탕 가는 세월 가는 세월을 허송치 말고

   직심스레 일해보자

※ 로류춘색…봄빛어린 길가의 버드나무

 

작품은 1900년대초에 편작되여 불리워지다가 1930년대 초에 최순경의 노래로 《오케》레코드에 취입되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계몽기초기에 불리워진 《한글풀이》는 여러 작품들이 있으나 우에서 례를 든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우리 나라에서 초기 애국문화계몽운동이 벌어지던 시기에 생겨난 이 노래와 함께 1896년 4월 7일에 창간된 《독립신문》에는 계몽가요의 가사들이 많이 실리군 하였다.

아래에 《독립신문》 1896년 5월 26일(건양원년 5월 26일)에 실린 리승원 작 《동심가》의 가사를 적어본다.

 

잠을 깨세 잠을 깨세

사천년이 꿈속이라

만국이 회동하야

사회가 일가로다

구구계절 다 버리고

샹하동심 동덕하세

남의 부강 부러 하고

근본없이 회빈하랴

범을 보고 개 그리고

봉을 보고 닭 그린다

문명개화하랴 하면

실상일이 제일이라

못에 고기 부러 말고

그물맺아 잡아보세

그물맺기 어려우랴

동심결로 맺아보세

 

〔주해〕

· 사천년이 꿈속이라…단군 4천년이 꿈속같이 흘러갔다는 뜻

· 만국이 회동하야…세계 여러 나라가 한마음으로 떨쳐 나선다는 뜻

· 샹하동심 동덕하세…웃사람과 아래사람이 서로 받들고 존경하라는 뜻임.

    《동덕》이란 천도교교인들끼리 서로 존경한다는 뜻으로 사용된 어휘임.

· 회빈…빛날소냐.(회빈이란 단어는 옛날에 천도교에서 쓰던 어휘였음.)

 

우에서 례를 든 《동심가》를 통해서도 알수 있는바와 같이 가사는 남의 부강을 부러워 하지 말고 마음과 마음을 하나로 합치고 자신의 노력으로 부를 창조하여야 한다는것을 강조하고있다.

아래에 같은 신문 1896년 6월 2일(건양원년 6월 2일)에 실린 《신문가》의 가사를 끌어온다.

 

초당에 깊이 든 잠

뉘라서 깨랴 난고

창외에 더댄 날이

삼간이 높아서랴

구천을 바라보니

미인옥루 어데메요

우연히 오난 말씀

우리 조선 신문이라

반갑고 장하도다

신문론설 장하도다

론설도 많컨마난

헌집론설 장하도다

자고이래 헌집목수

하나둘뿐 아니연만

뉘라서 통리하여

이러타시 소상한가

아마도 이 목수난

양공중 제일이라

헌연목과 헌기동을

그대로나 반듯 세워

아모리 풍우라도

삼우전복 없이 하여

공평렴직 벽을 치고

효제충신 문을 달며

인의도덕 도배하고

례악서수 자리 깔면

이 집도 옥루되여

우리 인민 높이 앉혀

광명촉을 켜여놓고

태평연을 배설할 때

이 목수와 저 목수며

억조창생 노닐적에

초당에 자던 사람

격양가를 불러보세

 

〔주해〕

· 헌집론설…편집부의 론설을 의미함.

· 양공중…기술자들중에서.

· 헌연목과 헌기동을…활판인쇄의 조판에서 쓰이던 어휘임.

· 삼우전복…삼복철장마에 무너지지 않도록 한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판을 짜는 활자들이 무너지

       지 않게 한다는 뜻임.

· 공평렴직…마음이 깨끗하고 공평하게.

· 효제충신…효제와 충신. 효성이 높은 제자와 충신을 의미함.

· 인의도덕…사람으로서 해야 할 도리와 도덕

· 례악서수…례절있게 순서대로.

· 광명촉…초불을 켜놓고, 불을 밝혀놓고.

· 태평연…태평스러운 연회, 화목한 연회, 화기애애한 연회

· 억조창생…수없이 많고많은 백성

· 격양가…풍년이 들어 농민들이 부르는 노래, 기쁨에 겨워 부르는 노래

 

이상에서 보는 《신문가》를 통해 이 시기 신문이 얼마나 중요하였던가를 알수 있다.

1800년대중엽과 말엽에는 창가조의 초기작품에 속하는 노래들이 불리워지면서 1900년대초로 이어져왔는데 《권학가》, 《학도가》, 《문맹퇴치가》 등이 널리 불리워지면서 애국문화계몽사업에 이바지하여왔다.

아래에 《독립신문》 1896년 4월 11일부에 실린 최돈성 작 《진충보국가》의 가사를 끌어온다.

 

대조선 건양원년

자주독립 기뻐하세

천지간에 사람되야

진충보국 제일이니

임금님께 충성하고

정부를 보호하세

 

〔주해〕

· 진충보국…나라에 충성을 다하여 은혜를 갚음.

 

우에서 례를 든 가사에는 자주독립국가를 기뻐하고 진충보국, 즉 충성을 다해서 나라의 은혜를 갚자는 호소가 담겨 져있다.

나라의 국운이 기울어져가고있던 리조말기의 사회환경을 놓고볼 때 《진충보국가》는 당시 우리 인민들의 소박한 애국적감정이였다.

그후 1900년대초에 이르러 《자력가》, 《소년남자가》 등이 창작되여 민간에 불리워졌다.

《자력가》는 오늘에 와서 《우리가 만들어 우리가 쓰자》의 곡명으로 출판되기도 하는데 일부 시어들이 다듬어졌다.

 

1. 산에서 금이 나고 바다엔 고기

   들에서 쌀이 나고 목화도 난다

   먹고 남고 입고 남고 쓰고도 남을

   물건을 낳아주는 삼천리강산

2. 조선의 동무들아 이천만민아

   두발 벗고 두팔 걷고 나아오너라

   우리것 우리 힘 우리 재주로

   우리가 만들어서 우리가 쓰자

3. 조선의 동무들아 이천만민아

   자작자족정신을 잊지 말아라

   내 힘껏 벌어라 이천만민아

   거기에 조선이 빛나리로다

 

이 노래의 1절 마지막행에서 《자원재부》는 《물건을》로, 3절의 2행에서 《자력지심》은 《자작자족》으로 다듬어졌다.

 

우에서도 언급한바 있지만 1800년대말엽과 1900년대초에 이르러 다양한 주제의 계몽가요들이 불리워지면서 1910년대와 20년대, 30년대에로 계주봉이 이어져왔다.

그렇다고 하여 광복이전에 창작된 가요들이 모두 창가풍의 가요로 이어지고 발전하였다는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4.4조로 되여있는 창가풍의 계몽가요는 전문가들의 창작이라기보다는 대중창작이다.

물론 전문가들도 창작하였을것이지만 주로는 여러 분야에 종사하고있는 지식인들과 민간에서 창작되여 나름대로 창가풍의 곡조를 달아 부른것이 전해져왔다.

악보들을 통해서도 이 시기의 노래들을 알수 있겠지만 《단군탄생가》, 《빛나는 조선》, 《학도가》, 《금주가》, 《살수에서의 승리》, 《무궁화동산》 등을 비롯한 수많은 계몽가요들이 창작되여 불리워지면서 예술가요창작의 밑거름으로 되였다.

 

 

 

2) 홍란파의 《봉선화》와 그의 가요들

 

우리 나라에서의 예술가요는 1920년에 창작된 홍란파(본명 홍영후) 작곡인 《봉선화》가 첫 작품이다.

아래에 홍란파의 간단한 경력과 그의 작품들을 함축해 본다.

1897년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하여 1941년에 사망한 홍란파는 우리 나라의 재능있는 작곡가였으며 바이올린연주가였다.

홍란파는 중학교를 졸업한 후 우리 나라의 초기 음악학교였던 《정악전습소》에서 공부하였다. 이《정악전습소》는 창립될 당시에 《조양구락부》라고 하였다. 《조양구락부》는 주로 양악만을 전습시켰던탓으로 민족음악을 홀시한다는 인민들의 항의로 하여 《정악전습소》로 명칭을 바꾸고 아악부, 양악부로 갈라서 민족음악과 현대음악의 후비들을 양성하였다.

홍란파는 《정악전습소》재학당시에 《양산도》와 《노래가락》을 바이올린으로 훌륭하게 연주하군 하여 그의 예술적재능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홍란파는 《정악전습소》를 졸업한 후 음악으로써는 도저히 외세에 짓눌린 험악한 세상을 살아갈수 없다는 부모들의 완고한 반대로 서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렇지만 그는 음악을 전공하리라는 지향을 굽히지 않고 일본에 건너가 우에노음악학교에 입학하여 고학하였다.

그가 고학하던 나날은 참으로 눈물겨운 생활의 련속이였다. 아득바득하며 신문배달노릇을 하고 밤이면 번화가의 네거리에 나서서 바이올린을 타면서 담배장사도 하여보았지만 도저히 학비를 충당할수 없어 간신히 2년간을 수료하고 1919년 봄에 귀국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귀국후에 그는 《봉선화》, 《옛 동산에 올라》, 《사랑》, 《그리움》, 《봄처녀》, 《사공의 노래》, 《여름밤의 별무리》를 비롯하여 수많은 가요들과 동요와 기악곡들을 창작하였다.

그는 문학에도 재능이 뛰여나 소설 《처녀혼》을 창작하였으며 연극 《최후의 악수》도 창작하여 자신이 직접 연출하고 출연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가 남긴 음악수필 《로렐라이의 유래》, 《월광곡》, 《쇼팡과 그의 련인》 등을 통하여 그의 문학적재능도 알수 있다.

그의 수필들을 읽어보면 수필다운 양상이면서도 거기에 담고있는 내용들은 단편소설적인 구성미가 안겨오는것이 특징이다. 그렇다고 하여 수필이라는 작은 그릇에 담고있는 내용이 넘쳐나서 물의감이 있다는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수필이라는 짧은 글에다 담고있는 내용이 그만큼 알차고 무게가 있으면서도 간결한 형상의 특기들로 하여 내용과 형식의 통일을 이룬다.

이렇듯 다방면적인 예술적재능을 소유한 홍란파의 대부분의 음악작품들은 일제에게 나라를 잃은 통절한 마음과 자기가 나서자란 고향산천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는것이 특징이다.

1920년에 창작된 가요 《봉선화》는 나라를 잃은 애조곡(哀調曲)으로 널리 불리워졌다.

이 노래가 우리 민족의 정서적감정을 담고있으면서도 은은하게 처량한 감정이 안겨드는것은 그 시기 우리 민족이 처해있던 비극적처지와 3.1운동이후 애국자들을 체포하여 잔인하게 학살한 일제의 야만적인 탄압으로 하여 가슴에 설음이 맺혀들었던 사정과도 관련된다. 그러나 우리 민족이 처해있던 비극적감정을 그대로 표현할수 없어서 은은한 정서를 담고 예술적으로 승화시켜나갔다.

가요 《봉선화》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깃들어있다고 한다.

1919년에 해외에서 음악공부를 하다가 귀국한 홍란파는 우리 나라의 가요집과 음악계몽잡지를 발행하기 위하여 고심하던 끝에 《삼광》(三光)이란 잡지를 발행하였다. 그러나 자금난으로 겨우 3호까지 발행하고는 페간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때 그의 집은 서울에 있었는데 어릴 때 송아지동무들과 함께 뛰놀던 고향산천이 그리워 경기도 수원에 팔달산을 끼고앉은 향촌마을을 찾아갔다.

그가 꿈결에도 잊을수 없었던 그리운 고향에 찾아온 바로 그 이튿날이였다. 이웃집의 봉선이란 처녀가 방직회사 녀공으로 팔리워가면서 그를 찾아왔다.

소학교시절에 홍란파는 가난한탓으로 학교에 못 가는 봉선이가 불쌍하여 그에게 가끔 글도 배워주고 노래도 배워주군 하였다.

그때 봉선이는 남달리 봉선화를 사랑하였다. 그는 해마다 자기 집 뜨락에다 봉선화를 심고 가꾸었으며 홍란파의 집 울타리밑에도 잊지 않고 봉선화를 심어주군 하였다.

봉선이는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이후 살길이 막히게 되자 방직회사로 팔리워가면서 홍란파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작별인사를 하려고 찾아왔던것이다.

《영후오빠, 잘 있으라요. 인젠 오빠의 양행금소리도 다 들었군요. 마지막으로 한곡조 듣고싶어요.》

영후란 홍란파의 본명이였다. 홍란파는 자기를 친오빠처럼 믿고 찾아온 봉선이의 마지막부탁을 들어주려고 바이올린을 들었으나 그를 위로해줄만 한 곡을 찾을수 없었다.

걸음걸음 피눈물을 뿌리며 떠나가야 할 그앞에서 《양산도》를 탈수도 없었고 《노래가락》을 탈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아리랑》을 타던 그의 머리에는 언뜻 하나의 곡상이 떠올랐다. 작곡가 홍란파는 그 곡상을 잡고 활을 그어나갔다. 그런데 자기도 모르게 흐르던 눈물이 바이올린의 음선을 적시고 음선에서 활이 미끄러져 처량하게 흐르던 바이올린소리도 뚝 멎고말았다.

그러자 솟구치는 눈물을 참느라고 입술을 깨물며 서있던 봉선이가 어깨를 들먹이며 울기 시작하였다.

봉선이가 흐느껴 울자 그를 바래주려고 모였던 사람들모두가 눈물을 흘리였다.

이날 마을사람들과 함께 봉선이를 바래주고난 홍란파는 방금전에 탔던 곡상을 그대로 5선지에 적어나갔다.

그후 작곡가는 울밑에 피여난 봉선화를 볼 때마다 이 곡을 타면서 봉선이를 생각하였고 나라를 잃은 민족의 슬픔을 통탄하였다. 봉선이의 비참한 운명이자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라고 생각한 작곡가는 이 곡을 다듬고 또 다듬었다.

이렇듯 가요 《봉선화》에는 작곡가에게 가슴 아픈 충격을 준 그 시대의 비참상이 깔려있다.

사상주제적내용뿐만아니라 형상에서도 이채를 띠고있는 이 가요는 소박한 음조와 장단의 규칙적인 반복으로 사람들을 깊은 사색에로 이끌어가는것이 특징이다.

더우기 이 노래가 홍란파의 처녀작이라는것을 생각할 때 여기에서 그의 뛰여난 음악적재능을 뚜렷이 찾아보게 된다.

가요 《봉선화》는 창작된 초기에 바이올린독주곡으로 가사가 없이 슬프다는 뜻에서 곡명이 《애수》였다.

그후 작곡가는 자작소설 《최후의 악수》를 연극으로 각색하여 주역으로 출연하면서 막이 오르기 전에 바이올린으로 이 노래를 독주하군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연극에 출연하던 동료들이 이 곡을 순수 바이올린으로만 탈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부를수 있도록 가사를 붙이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김형준이 가사를 달아주었는데 작곡가가 봉선이를 바래주면서 얻은 곡상이기때문에 곡명을 《봉선화》라고 하였다. 이 노래는 바이올린독주곡이였던탓으로 성악곡으로는 어딘가 모르게 아쉬운감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노래가 1920년에 창작되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창가풍의 가요들에 비하여 새로운 예술적경지를 개척한 작품의 하나라는데로부터 높이 평가되고있다.

이 노래에 가사가 달린 이후부터 민간에 급격히 보급되였는데 일제는 《봉선화》를 못 부르게 《금곡령》을 내렸던것이다.

그러나 일제는 그 어떤 야수적탄압으로써도 가요 《봉선화》의 보급을 막을수 없었다.

그 시기 이 노래가 일제의 탄압의 대상으로 되였던것은 2절에서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라는 표현이 일제의 악정과 학정밑에서 신음하는 우리 민족의 설음이 은유적수법으로 깔려있기때문이며 3절에서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고 한 표현이 나라의 광복이 도래하기를 바란다는 뜻이였기때문이다.

이 노래가 창작된 때로부터 아득한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까지도 우리 인민들속에서 예술적생명력을 잃지 않고있을뿐만아니라 해외에서 살고있는 동포들속에서도 널리 불리워지고있다.

이 노래는 지금 오랜 세월을 두고 전해지면서 8분의 6박자로도 불리워지고있는데 이 책에 실리는 악보는 8분의 9박자로 된 바이올린독주곡의 원곡이다. 이밖에도 1920년대초와 중엽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이 시기 대부분의 가요들이 비탄에 젖어들기 시작하던 때 홍란파는 감정의 즉흥적표출을 피하고 어디까지나 가요로서의 형상미를 보여주기 위하여 고심하였다.

홍란파의 가요들중에서 《봉선화》가 대표작이라면 동요에서 대표작은 《고향의 봄》이다.

일제침략자들에게 나라를 빼앗긴 그 시기 이 땅에서 살래야 살수가 없어 피눈물을 뿌리며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느는 겨레들과 현해탄을 건너 일본의 광산이나 탄광지대로 내몰리는 동포들이 날을 따라 늘어났다. 그렇기때문에 우리 민족은 망국의 설음과 타향살이의 슬픔을 함께 겪어야만 하였으니 《고향의 봄》이 창작된것은 그 시대가 안겨준 음률이다.

비록 동요이긴 하지만 어른들도 함께 불렀던 애향곡…

고향을 떠난 리향민의 슬픔을 함께 나누면서 오랜 세월 우리 겨레의 애창곡이였던 《고향의 봄》이 창작된 때로부터 세월이 흘렀으나 사람들은 오늘도 이 노래를 불러보군 한다.

애향심이 절절하게 안겨드는 이 노래를 불러보느라면 일제의 기반에 억눌렸던 피맺힌 력사와 설음을 회고해보게 되고 오늘에 와서 이런 비극을 모르고 사는 자주적인 인간으로 보람있게 살고있는 행복과 긍지를 가슴뜨겁게 체득하군 한다.

홍란파의 작품들중에서 《사공의 노래》, 《그리움》도 가요로서의 품격있는 형상미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사공의 노래》에서 작곡가는 《두둥실 두리둥실 배 떠나간다/ 물 맑은 봄바다에 배 떠나간다》라고 한 시어들에 운치있는 선률을 달아놓았으며 가요에서의 적절한 변박자의 도입이 선률진행에서 예술적형상미를 이룬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사공의 노래》와 함께 《그리움》도 그 시기의 가요들 중에서 형상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뉘라서 저 바다를 밑이 없다 하시는고

백천길 바다라도 닿이는 곳 있으리만

님그린 이 마음이야 그릴수록 깊으이다

(2절생략)

깊고 먼 그리움을 노래우에 얹노라니

정회는 끝이 없고 곡조는 짜르이다

곡조는 짜를지라도 남아 울림 들으소서

 

악보를 더듬어보면 알수 있겠지만 《그리움》은 4분의 3박자로 이어지다가 끝부분에 가서는 작곡가가 바이올린연주가였던탓인지 바이올린적인 선률의 흐름이 안겨온다.

더우기 중간부분에 간주가 있는 노래들은 거의나 그앞의 선률이나 다음에 나올 선률을 미리 들려주는 수가 많은데 이 곡에서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선률을 간주로 삼고있는것도 짧은 형식의 가요치고는 특색의 하나라고 볼수 있다.

그러나 이 노래를 불러보면 어딘가 모르게 아쉽다는감이 들기도 하는데 그것은 반주의 리듬이 선률과 동떨어져있는 느낌이 들기때문이다. 그렇지만 감정의 색다른 조화감이 이 노래의 총체적인 균형미로 어울리는 점도 이 노래가 안고있는 특성의 하나라고 볼수 있다.

이밖에도 홍란파는 《봄처녀》, 《여름밤의 별무리》, 《성불사의 밤》, 《옛 동산에 올라》, 《사랑》 등을 비롯하여 수많은 작품들과 동요, 기악곡 등을 창작하였다.

이렇듯 창가풍의 가요에 머물러있던 우리 나라 가요에 새로운 활력과 그 예술적경지를 개척해나간 홍란파는 참으로 우리 나라 현대가요창작의 선구자였다.

 

 

3) 예술가요의 발자취

 

이 시기 홍란파의 뒤를 이어 리은상 작사, 박태준 작곡인 《동무생각(사우)》이 창작되였으며 김경 작사, 안기영 작곡인 《작별》, 박순덕 작사, 안기영 작곡인 《추억》 등이 창작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창작된 예술가요들은 일련의 결함들을 안고있다.

그것은 신작가요들에 대한 일제의 《조선총독부》의 악랄한 탄압책동으로 하여 마음속에 분출하는 애국적감정을 가슴속깊이 묻어두고 비유나 은유적수법을 쓰지 않을수 없었기때문에 몇몇 예술가요들은 순수하게 자아적감정선에 머물러 예술적승화를 이루지 못한것이다.

아래에 리은상 작사, 박태준 작곡인 《동무생각(사우)》부터 먼저 언급해본다.

 

1. 봄의 교향악이 울려퍼지는

   청라언덕우에 백합필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여날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2. 더운 백사장에 밀려들 오는

   저녁조수우에 흰 새 뛸적에

   나는 멀리 산천 바라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저녁조수와 같은 내 맘에 흰 새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떠돌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3. 소리없이 오는 눈발사이로

   밤의 장안에서 가등 빛날 때

   나는 높이 성궁 쳐다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밤의 장안과 같은 내 맘에 가등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빛날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동무를 생각하고 사랑하는 정우적인 감정이 진실하게 안겨드는 이 노래는 무엇인가 우아하고 깨끗하며 사색의 여운이 있는것으로 하여 그 시기 사람들속에서 애창되였다.

이 노래의 1절에서는 백합이 취급대상이였다면 2절에서는 저녁조수에 뛰노는 흰 새이다. 그리고 3절에서는 밤의 장안과 같은 마음속에 빛나는 가등이다.

이 노래는 하나의 관통선을 안고 이어지는 취급대상이 아니다. 매 절마다 취급대상이 다르다. 그렇지만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라는 시어로써 관통선을 이어나가고있다.

이 작품에서 서정적주인공의 마음이 은유적표현으로 되고 있는 《모든 슬픔》은 빼앗긴 조국에 대한 감정이다. 나리꽃의 일종인 백합이 피여날 때, 그리고 저녁에 밀려오는 조수에 흰 새가 천진스럽게 뛰놀며 정답게 날아예일 때, 눈 내리는 밤거리에 가등과 같은 밝음이 빛날 때에는 이 땅에 서린 모든 슬픔, 나라를 잃은 설음이 가시여진다는 비유적수법을 적용하였다.

그렇지만 비유의 대상을 너무 깊이 묻어두었기때문에 노래가 사회적으로 일반화될수 있는 기초가 약한것으로 하여 감정선이 적극적으로 전개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현대가요, 즉 예술가요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지 못하고있던 시기의 작품이라는것을 놓고볼 때 《동무생각(사우)》은 1920년대에 창작된 가요들중에서 홍란파의 《봉선화》와 함께 두 기둥을 이룬다.

이밖에도 예술가요로서는 김경 작사, 안기영 작곡인 《작별》과 박순덕 작사, 안기영 작곡인 《추억》도 사람들속에서 애창되였던 노래들이다.

하지만 이 시기의 예술가요들은 대중가요(류행가)처럼 활력있게 예술적통로를 열어나가지 못하였다. 그것은 대부분의 예술가요 작곡가들이 교편을 잡고있었거나 다른 분야에 종사하고있었기때문에 창작편수가 너무나도 적었던탓이다.

1920년대를 지나 1930년대에 이르러 예술가요는 별로 창작된것이 없었고 리은상 작사, 채동선 작곡인 《갈매기》, 현재명 작사, 작곡인 《오라》가 창작된 이후 한동안 공백상태를 이루다가 1939년에 김안서 작사, 라운영 작곡인 《가려나》가 창작되여 다행스럽게도 완전한 공백기를 면할수 있었다.

악보를 더듬어보면 알수 있겠지만 이 노래는 어딘가 모르게 동요스러운데가 있으나 1939년에 《동아일보》의 현상모집에서 우수작으로 입상되여 사람들속에서 널리 불리워졌다.

1930년대말엽과 1940년대초에 이르러 예술가요의 작곡가들은 주로 가극의 창작에 전념하고있었다.

작곡가 안기영은 《콩쥐팥쥐》와 《견우직녀》의 작곡을 담당하여 유산을 남겨놓았다.

아래에 가극 《견우직녀》의 주제가들중에서 《환우곡》의 가사를 끌어온다.

 

팔담은 어드메뇨 물소리만 들려오네

내 어이 갈거나 선녀는 어데 있나

바람소리 잦아있네

내 어이 만나리

내 어이 만나리

송풍은 거문고요 피리는 내련만은

이 풍악 이 장단에

춤출이 그 누구리

 

안기영은 1930년대말엽과 1940년대초에 이르러 비탄조로 도식화가 초래되는 생기 없는 대중가요풍의 노래를 극력 경계하면서 가극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예술가요의 참신한 인식을 주는 한편 당시 우리 나라 음단이 나아갈 옳은 방향선을 세우기 위하여 고심하였다.

아래에 가극 《견우직녀》의 주제가들중에서 《진주담의 노래》를 더 적어본다.

 

옥경도 좋거니와 금강 또한 좋을네라

맑은 물 거울되니 이내 몸 둘이로다

한몸은 물우에 또 한몸은 물속에

옥경도 좋거니와 금강 또한 좋을네라

 

우에서 인용한 가극 《견우직녀》의 주제가들인 두 노래는 당시 우리 나라 고전문학평론가였던 설의식 작사이다.

1940년에 접어들면서 안기영은 가극 《견우직녀》를 서울과 지방들에서 공연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자신이 작곡가였고 지휘자였으며 공연조직자이기도 하였다.

1930년대가 저물고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예술가요는 명맥을 이어나가지 못하였다. 이 분야에서 기대가 컸던 홍란파는 중병을 만나 1941년에 사망하였고 작곡가 박태준은 교편을 잡고 초청지휘자로 이따금씩 음악활동을 하였다.

이외에 현재명을 비롯한 몇몇 작곡가들도 교편생활을 하고있었던 까닭에 예술가요들이 더 창작되지 못하였다.

특히 1940년부터는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창작이 움츠러 들었기때문에 광복이전의 전기간에 걸쳐 예술가요의 수가 많지 못하다.

그러나 작가 김형준, 리은상, 김경, 설의식과 작곡가 홍란파, 안기영, 박태준, 채동선, 현재명, 라운영 등이 남긴 작품들은 우리 나라 예술가요유산의 재부로 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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