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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연재 『단군민족의 명인들』(10)

바다의 제왕 리순신

프레스아리랑 | 기사입력 2023/02/17 [01:42]

도서연재 『단군민족의 명인들』(10)

바다의 제왕 리순신

프레스아리랑 | 입력 : 2023/02/17 [01:42]

                          36)바다의 제왕 리순신 

 

임진조국전쟁(1592-1598년)의 승리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능숙한 지휘와 뛰여난 전략전술로 군사적공적을 세운 많은 애국명장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가운데서도 제일 먼저 생각하게 되는것은 바다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왜적의 함대를 쥐락펴락한 바다의 제왕 리순신일것이다.

리순신은 훌륭한 군사적지략과 능숙한 지휘로 군민의 애국적열의를 불러일으켜 약한 수군병력을 가지고도 전라도 물목을 지키고 한산도에서 일본수군을 전멸시킴으로써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나아가서 적들의 《수륙병진》계획을 파탄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 애국으로 수놓아진 한생

 

리순신(1545-1598년)의 자는 여해이고 본관은 덕수이다. 그는 1545년 3월 8일 한성(서울) 건천동에서 리정의 셋째아들로 출생하였다. 그의 어머니가 임신중에 있을 때 하루는 시아버지가 꿈에 나타나 귀한 아이를 낳을것이니 이름을 순신이라고 지으라고 하였다고 한다.

리순신은 철이 들면서부터 두 형과 함께 서당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재주가 있어 글공부로 성공할수 있을것이라고 기대되였다. 하지만 그는 항상 무예를 배우고싶어하였다.

그는 아이적부터 영특하고 잘게 놀지 않아서 여러 아이들과 놀 때에는 반드시 군대놀음을 하고 그 군대놀음에서 반드시 대장으로 추천되였다. 동네간에 불공평한 일이 생기면 약한 편을 돕기때문에 동네사람들이 어려워하였다. 나무를 다듬어 활과 화살을 만들어가지고 놀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그의 눈을 쏘려고 하기때문에 어른들가운데서도 겁이 나서 그의 집문앞을 지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리순신은 좀 커서는 성격을 죽이고 례절을 지키면서 글공부를 하였으나 대의만을 짐작하는데 그치고 전문하기를 즐기지 않았다.

1566년 22살 나던 때부터 무술을 익히기 시작하였는데 힘으로 보나 말타고 활쏘는 재주로 보나 누구도 당할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성격이 엄숙하고 강직하여 같이 다니던 친구들이 저들끼리는 종일 서로 롱담을 하면서도 순신에게만은 너나들이를 못하고 항상 존경하였다.

1572년 8월 훈련원 별과시험을 보던중 말을 달리다가 미끄러져서 왼쪽다리뼈를 분질렀다. 그는 한다리로 일어서서 버드나무를 꺾고 껍질을 벗기여 상처를 동여매였다. 과거시험 보는 마당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 장하게 여기였다.

1576년 2월 식년과거시험(4년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보이는 과거) 무과에 급제하여 그해 12월에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으로 임명되였다. 그때 리후백이 함경감사가 되여 각지를 순회하면서 주둔부대의 장수들에게 활을 쏘게 해보고 잘못 쏘는 사람들에게 곤장을 안기였다. 그 곤장을 면하는 사람이 매우 드물었는데 동구비에 이르러서는 본래부터 리순신의 이름을 들어 알고있었던지라 매우 친절하게 대하였다고 한다.

리순신은 1579년 2월에 훈련원 봉사로, 10월에는 충청도 절도사의 막하 군관으로, 1580년 7월에는 발포수군만호로 임명되였다.

1583년 7월에 함남도절도사 리용이 임금에게 청하여 리순신을 자기 막하에 데려다 두었다. 10월에 건원보의 권관으로 임명되였다. 그때 녀진족 을지내가 국경을 소란스럽게 굴었지만 조정에서는 걱정만 하고 토벌하지 못하였다. 그러던것을 리순신이 계책을 써서 유인하여 사로잡아죽였다.

1586년 1월 사복시 주부로 임명되였던 리순신은 녀진족의 침입이 빈번하므로 다시 조산병마만호로 전임되였다. 8월에 녀진족이 록둔도를 침범하는것을 물리치고 그 괴수를 쏘아죽였으며 잡혀가던 둔전군 60여명을 되찾아왔다. 원래 리순신은 록둔도의 둔전관을 겸하고있으면서 이 섬이 멀리 외따로 있다고 증원을 요청하였었다. 그런데 병사 리일은 그 청을 듣지 않았으며 일이 터지자 자기의 죄를 면해보려고 모든 책임을 리순신에게 들씌워 처형하려고 하였다. 리순신은 리일의 거짓보고로 하여 백의종군명령을 받았다.

1589년 2월 전라도순찰사 리광이 리순신을 천거하여 자기 막하의 조방장으로 두었다. 그해 7월에는 선전관으로, 12월에는 정읍현감으로 임명되였으며 정치를 잘하여 신망을 얻었다. 그때 잠시 태인현감을 겸임하게 되였다. 그가 태인현에 가보니 원이 오래동안 없었기때문에 서류가 잔뜩 밀리여있었다. 리순신이 하나하나 처리하는데 마치 물흘러가듯 하여 백성들이 기뻐하면서 어사에게 그를 태인으로 옮겨달라고 청원했다고 한다.

나라방비와 관련하여 군사인재를 천거할 때 리순신과 한고향내기이고 그의 재능을 잘 알고있는 류성룡이 그를 천거하였다. 1590년 7월에 리순신은 고사리진 병마첨절제사로 임명되였으나 대간들이 원을 자주 바꾸는것은 좋지 않다고 반대하여 그만두었다. 다시 8월에 직품을 당상으로 올리고 절충장군으로 임명하였으며 만포진 수군첨절제사로 전임되였으나 또 대간들이 너무 갑자기 벼슬을 올린다고 반대하여 그대로 눌러앉고말았다.

1591년 2월에 진도군수로 임명되였다가 미처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가리포진 수군첨절제사로 전임되고 또 미처 부임하기도 전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승급되였다. 사간원에서 순서를 뛰여넘어 수사로 임명한것은 잘못되였다고 제의하였으나 선조는 리순신이 넉넉히 그 임무를 감당해낼수 있다고 하면서 사간원의 제의를 부결하였다.

리순신은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후 왜적이 반드시 쳐들어올것이라고 예견하고 장병들과 인민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창발성에 의거하여 함대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들을 취하였다. 각종 전선들과 무기, 군사시설들을 부단히 점검하고 정비보강하도록 하였으며 군률을 엄격히 세우고 병사들의 훈련에 깊은 주의를 돌렸다. 그가 지은 《란중일기》에 의하면 그는 1592년 1월부터 4월 15일까지 103일 기간에(리순신이 왜적의 침입통보를 처음으로 받은것은 4월 15일이였다.) 사정이 있어 12일간 쉰것을 제외하고는 26회의 현지순찰과 28회의 활쏘기연습 등 싸움준비로 날과 달을 보내였다.

리순신은 적아를 깊이 연구하고 그에 맞는 군사적대책들을 강구하였다. 그는 조선수군의 장점은 화포를 가진것이고 약점은 훈련되지 못하고 조직적인 행동이 부족한 점이라는것, 일본사무라이들은 도창에 의한 돌격전법과 불의타격전법을 쓰는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무기고에서 녹쓸고있던 화포를 꺼내여 수리정비하거나 새로 개조하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병사들이 화포와 화살을 능숙히 다룰수 있도록 훈련시켰다. 총통들의 사정거리가 대체로 1~4km정도로서 사거리가 100m정도인 왜적의 조총보다는 우수하지만 당시는 조준경이 없는 유치한것이고 또 흔들리는 배우에서 쏘아야 하므로 숙련되지 못하면 막대기보다도 못할수 있었다. 또 접현전이나 함상전에서 조총은 한발 재우는데 20초가 걸리므로 그사이에 여러발 쏠수 있는 활이 유리하였지만 역시 잘 쏠줄 아는것이 중요하였다. 때문에 리순신은 장병들의 활쏘기연습과 화포쏘는 훈련에 관심을 돌렸던것이다.

리순신은 왜놈들의 돌격전법을 좌절시키고 공격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리조초기 왜구와의 싸움을 위해 창안제작되였던 거북선을 더욱 훌륭하게 개조할 구상을 하고 라대용과 그의 사촌동생 치용에게 그 책임을 맡겼다. 등에 2~3mm 두께의 장갑을 해씌운 거북선은 세계최초의 철갑선으로서 전쟁이 일기 이틀전인 4월 11일에 제작이 완료되였다. 전쟁초기 우리 수군에는 2척의 거북선이 있었고 전쟁 전기간   3척이 전투에 리용되였던것으로 보인다.

리순신은 쇠바줄을 엮어 좌수영 앞바다에 늘이는 조치도 취하였다.

리순신의 옳은 군사적조치와 장병들의 헌신적노력에 의하여 전라좌수영함대는 무적의 함대로 준비될수 있었다.

1592년 4월 리순신은 왜적이 끝내 침입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놈들의 《수륙병진》계획을 파탄시킬 작전계획을 세웠다.

이때 경상도수군은 좌수사 박홍과 우수사 원균의 무능과 비겁성으로 하여 큰 싸움 한번 변변히 못해보고 붕괴되였다. 수하의 전함 70여척(100여척이라고도 한다.)과 화포, 병기들을 모두 바다속에 처넣고 비장 리영남, 리운룡 등과 함께 4척의 배를 타고 곤양포구에 이르러 도망치려던 원균은 전라도에 원병을 청하여 한바탕 싸워보고 이기지 못하면 그때에 도망쳐도 늦지 않을것이라는 리영남의 의견을 좇았다.

리순신은 영남에게 《서로 맡은 계선이 다르거니 조정으로부터 명령이 없으니 어찌 마음대로 지경을 넘겠느냐.》고 하였다. 영남은 5~6차례 원병을 청하였다. 리순신은 마음속으로는 당장 달려가서 한바탕 싸우고싶었으나 조정에서 트집을 잡을수도 있고 또 전쟁형편도 채 료해하지 못한 형편이여서 주춤거렸던것이다.

숱한 배와 장비를 물속에 처넣고 1만여명의 수군까지 다 분산시켜놓은 원균은 리영남이 헛탕치고 돌아올 때마다 배머리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였다. 전라도수군의 도움으로 명예를 회복해보려던 꿈이 깨여지고 패전장수로 목이 잘려야 할 처지가 눈물겨워서였으리라.

나라와 겨레가 당하는 치욕을 누구보다도 가슴아파하던 리순신은 적을 맞받아나가 칠 결심을 다졌다. 그런데 관하의 여러 장수들은 모두 자기가 책임진 지방을 떠나 다른 도로 가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군관 송희립과 록도만호 정운만이 리순신과 의견을 같이하였다.

리순신은 목소리를 가다듬어 이렇게 웨쳤다.

《오늘의 형편으로서는 오직 적을 공격하다가 죽어야 할것이다. 감히 이를 반대하는 자는 목을 칠것이다.》

드디여 5월 1일 본영 앞바다에 여러 장수들을 집합시켰는데 판옥선이 24척, 협선이 15척, 포작선 46척이였다.

리순신은 전라우도수사 리억기와 련계를 가지고 함께 진격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그무렵 적들이 벌써 수도로 다가가고있다는 소식을 받자 5월 4일 새벽 2시경 리억기의 수군을 기다리지 않고 단독으로 출항하였다. 이것이 조선수군의 제1차 출전이였다.

6일 아침 9시경 원균이 판옥선 1척을 타고 희색이 만면하여 당도하였고 이어 경상우수영의 판옥선 3척과 협선 2척이 당도하였다. 아군함대는 90여척으로 늘어나게 되였다. 여기서 포작선은 함대의 위용을 시위하기 위해 리순신이 징발한 민간어선들이였다.

7일 우리 수군함대는 옥포항구에서 략탈한 물건들을 배에 싣던 적선 50여척(30여척이라고도 한다.)을 포위공격하였다. 이날 싸움에서 아군함대는 적장 도또 다까도라와 호리우찌 우지요시의 휘하 수군을 격파하고 26척을 격침시켰다. 바다에서 우리 수군이 거둔 첫 승리는 륙지에서 싸우던 우리 인민들에게 신심을 안겨주었다. 조정에서는 이때 매우 기뻐하면서 리순신의 직품을 가선으로 올려주었다.

오후 5시쯤 되여 영등포(거제도 북단) 앞바다에서 지나가던 왜적의 대선 5척을 또다시 격침, 격파하였다.

8일 우리 수군함대는 고성 적진포(통영군 광도면 적덕리)에서 왜의 대선, 중선 13척을 공격하여 격파, 소각해버리였다.

우리 수군은 이 해전들에서 총 44척의 적함선들을 격침, 격파하고 9일 일단 전라좌수영의 기지로 돌아왔다.

5월 29일 리순신은 전선 23척을 거느리고 두번째로 출전하여 로량 앞바다에 이르러 원균이 거느린 경상우수영의 함선 3척과 합세하였다. 아군함대는 리순신의 지휘밑에 사천에 정박하여 략탈행위를 하고있던 왜적의 함대를 공격하여 12척을 침몰시켰다. 겨우 살아남은 놈들은 멀리서 바라보며 발을 구르고 소리를 내며 징징 울어댔다. 리순신은 이 싸움에서 왼편어깨에 탄환을 맞고 부상당하였으나 태연하게 싸움을 지휘하였다.

6월 2일 우리 수군함대는 당포선창에 배를 대고 뭍에 올라 로략질을 하던 적들을 공격하였다. 21척으로 이루어진 적선단은 적장 가메이 고레노리의 부대와 구루시마 미찌유끼부대의 련합함대로서 《수륙병진》기도의 실현을 위해 서해로 가던중이였다.

아군함대는 거북선을 앞세우고 공격하여 적선 21척을 격침격파하고 적장 구루시마를 죽였으며 1582년 6월 8일에 도요또미 히데요시가 가메이에게 준 금부채를 로획하였다. 배를 잃은 가메이는 후에 뭍에서 돌아쳤다.

아군함대는 6월 4일에 리억기의 전라우수영의 전선 25척과 합세하여 충천한 기세로 진격하여 다음날 당항포에서 왜선 26척을 수장해버렸다. 이때 적선 1척은 남겨두었었는데 그것은 륙지로 기여올랐던 놈들이 다시 배를 타고 도망치려고 할 때 몽땅 잡아치우기 위해서였다. 리순신의 계책에 빠진 적들은 밤을 리용하여 륙지에 올랐던 놈들을 걷어싣고 도망치다가 당항포어구에서 대기하고있던 조선수군에 의하여 격파되였다. 적병 100여명이 물고기밥이 되였다. 당항포 앞바다싸움의 승전보고에 접한 조정에서는 리순신의 직품을 자헌대부(정2품의 아래급)로 올리였다.

그후에도 률포 등지에서 여러척의 적선을 격침격파하고 6월 10일 기지로 개선하였다.

우리 수군함대에 의하여 일본수군이 계속 녹아나자 도요또미 히데요시는 하루속히 조선함대를 격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6월하순에 적의 수군장수들인 구끼 요시다까, 가또 요시아끼, 와끼자까 야스하루는 지시에 따라 조선수군함대를 격파하기 위한 선단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구끼와 가또의 함선준비가 채 완료되지 않은것으로 하여 와끼자까는 7월 8일 단독으로 김해포구를 출발하였다.

한편 적정을 보고받은 리순신은 조선수군을 어째보려고 달려드는 적수군을 맞받아 공격하기 위하여 7월 5일에 전투대렬을 다시 편성하고 6일에 려수를 떠났다. 이것이 조선수군의 제3차 출전이였다. 로량에서 경상우수영의 함선 7척과 합세하였다.

7월 8일 조선수군함대는 고성 견내량으로 진격하였다. 리순신은 와끼자까가 거느린 70여척의 적함을 유인하여 한산도 앞바다로 끌고가 59척을 수장하였다. 이 해전이 바로 전쟁국면에 결정적영향을 준 《한산도대첩(한산도대승리)》이였다. 조정에서는 리순신의 공로를 평가하여 정헌대부(정2품의 웃등급)로 승격시켰다.

7월 10일 아군함대는 안골포에 정박해있던 구끼와 가또의 함선 42척과 접전하였다. 이 싸움에서 아군함대는 구끼의 배를 포함하여 수십척의 적선을 격침격파하였다.

아군함대는 3차출전을 통하여 조선수군을 제압하고 해상권을 다시 장악하기 위해 급파된 와끼자까, 구끼, 가또의 적함선집단을 여지없이 격파하였다. 한산도해전의 승리로 제해권은 우리 수군의 수중에 장악되였고 적들의 《수륙병진》계획은 파탄되였다. 적들의 함대는 싸우기를 포기하고 부산포안에 숨어서 출격하려고 하지 않았다.

리순신함대는 8월 24일 부산포를 향하여 출전하였다. 25일 사량 앞바다에 이르러 경상우수영의 수군과 합치였는데 170여척에 달하였다.

항행도중 조선수군은 장림포, 화준구미, 다대포, 서평포, 절영도 등지에서 모두 34척의 적선을 격침시켰다.

9월 1일 아침 아군함대는 사나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적선 470여척이 정박해있는 부산포 앞바다로 진격해들어갔다. 조선수군은 이 싸움에서 적선 100여척을 격침시키고 수많은 적을 살상하였다.

부산포앞바다싸움의 승리로 적들의 《수륙병진》계획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게 되였으며 남해에서의 조선수군의 제해권이 더욱 확대됨으로써 적들의 생명선인 부산과 일본사이의 바다길은 끊어질 위험에 처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적들의 침략계획수행에 치명적인 위기가 조성되였다. 적들은 이후 우리 수군함선만 보아도 겁에 질려 륙지로 도망치고 감히 접어들지 못하였다. 한편으로 적들은 부산으로부터 웅천에 이르는 해안선의 방어를 강화하는데만 급급하였다.

리순신의 지휘밑에 조선수군은 4개월동안에 적선 400여척을 격침시키고 42척을 크게 격파하였다.

1593년 2월 8일 우리 수군은 부산까지 적을 추격하여 왜장을 쏘아죽이고 적선을 모조리 불살라버리였다. 22일에 또다시 적을 크게 격파하였는데 급해맞은 적들은 발을 구르며 징징 울어댔다고 한다.

8월에 조정에서는 리순신이 본직을 그대로 가지고 삼도수군통제사를 겸임하게 하였다.

리순신이 거느린 우리 수군함대는 1594년 3월 4일과   5일사이에 진해 당항포앞바다싸움에서 적선 31척을 소멸하였다.

그해 9월에는 곽재우, 김덕령 등 의병장들과 손잡고 적을 공격하였다.

리순신은 원균의 모함과 우리 수군을 해치려는 왜적들의 간계로 하여 1597년 2월 통제사직에서 철직되고 체포되여 압송되였다.

원균은 왜놈간첩들의 모략에 넘어가 1597년 7월 16일 칠천량으로 진격하였다가 왜적선의 기습을 받고 강력한 우리 수군을 졸지에 괴멸시켰다. 전라수사 리억기와 충청수사 최호는 전사하였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지휘하는 12척의 함선만이 전장을 리탈하여 보존되였다. 원균은 도망치다가 왜병의 칼에 맞아 너절한 운명을 마치였다.

바빠맞은 조정에서는 리순신을 다시 삼도 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남은 배가 12척밖에 안되였고 그마저 불비하였지만 리순신은 신심을 잃지 않고 함대재건에 달라붙었다.

그는 수군을 지휘하여 8월 28일에는 적선 8척이, 9월  7일에는 적선 13척이 습격하여온것을 격파하였다.

9월 16일 리순신은 명량(울돌)해협에 유리한 지점을 차지하고 도또, 구루시마 등이 지휘하는 적선 330여척과 맞서 싸웠다. 12 대 330, 너무도 엄청난 력량상 차이에도 불구하고 조선수군은 리순신의 지휘밑에 결사적으로 싸워 승리하였다. 이 전투에서 적선 30여척이 격파되고 적장 마다시 등 수많은 적들이 몰살되였으며 살아남은 적선들은 황급히 도주하였다. 이 전투를 력사에서는 《명량대첩(울돌대승리)》이라고 일러왔다.

이 전투가 있은 후 해남현 각지에 상륙했던 적들은 모조리 도망쳤다. 하여 적들의 2차침공시 서해에로의 진출은 다시 좌절되였으며 《수륙병진》기도도 파탄되였다.

울돌해전후 5개월사이에 수군병력수는 8,000명으로 장성하였다.

리순신의 지휘밑에 조선수군은 1598년 8월초 고금도에 침입해오는 적함대를 맞받아나가 포위공격을 들이대여 50여척을 소각, 침몰시켰다.

1598년 11월 19일 리순신의 지휘밑에 조선함대와 명나라함대는 련합하여 로량 앞바다에서 임진조국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결전을 벌리였다. 이 싸움에서 우리 수군은 적의 함선 200여척을 격침, 격파하고 근 2만명의 적을 소멸하였다. 하여 포위된 고니시부대를 구원하기 위하여 가던 시마즈의 함선집단은 섬멸적타격을 당하였다. 이때 로량바다는 적의 시체와 파손된 배쪼각, 병기, 의복 등이 바다를 뒤덮어 바다물이 흐르지 못할 정도였고 왜적의 더러운 피가 온 바다를 물들였다고 한다.

리순신은 이 싸움에서 직접 선두에 서서 북채를 쥐고 싸움을 지휘하다가 전사하였다.

조정에서는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우의정을 증직하고 사당을 세우는것을 허락하였으며 임금은 《충민》이라는 사당이름까지 주었다.

1604년 10월 군공을 평정할 때 리순신은 첫자리에 올랐다. 그리하여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이라는 공신칭호와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령 경연사 덕풍부원군》이라는 증직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선대들에게도 벼슬이 내려지고 집앞에 정문(봉건시대에 특별한 공이나 덕을 국가적으로 표창하기 위하여 세우는 문)을 세우게 되였다.

리순신은 통치계급의 한사람으로서 계급적제한성도 가지고있었지만 애국명장으로서의 그의 일생은 오랜 세월을 내려오며 사람들속에 전해지고있다.

  

2. 명장의 기묘한 책략

 

리순신은 수십차례의 해전을 조직지휘하는 과정에 새로운 해상전법들을 마련하였으며 중세해상전법들을 종합적으로 적용하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세계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선봉으로 한 공격 및 방어전법, 화약무기와 포를 장비한 함선들에 의거한 해상기동전술의 완성, 수군에 의한 륙전대의 조직과 그와 협동하여 항만에 집결한 적에 대한 공격전법의 창조와 그 적용, 화공작전, 학익진, 일선형, 제대형 등 다양한 전투서렬의 편성과 같은 풍부한 전법들은 력대 해상전법을 종합적으로 받아들이고 새롭게 더욱 발전시킨것이였다.

리순신은 거북선을 선봉으로 한 공격 및 방어전법을 창조하였다.

거북선은 돌격선이였다. 이것은 비유하면 륙전에서 전차라고도 할수 있었다. 세계전쟁사를 보면 처음에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하던 전차는 그후 군진의 맨 앞장에서 돌파구를 내는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군사상의 새로운 기적을 이룩하였다.

거북선은 바로 이러한 전차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거북선은 전투때 항상 맨 앞장에서 돌입하여 적함대의 전투서렬을 파괴하였다. 그리고 적의 기함에 접근하여 포나 충격으로 파괴함으로써 적들의 지휘체계를 혼란에 빠뜨리였다.

1592년 6월 2일 적장 가메이, 구루시마 등이 지휘하는 적 선단을 격파하는 당포싸움때 거북선은 선봉에서 돌격하면서 적의 기함을 들이받아 파괴하고 현자, 천자, 지자총통, 대장군전으로 그것을 짓부셔버리였다. 뒤따르던 함선들에서는 편전, 승자총통 등으로 일제사격을 들이대여 적의 기함을 격침시키고 적장도 수장해버렸다. 그다음에 혼란에 빠진 적선들을 좌충우돌하면서 공격하여 모두 침몰시켜버렸다.

사천앞바다싸움이나 당항포해전, 한산도해전 등 여러 전투들에서도 거북선을 선봉으로 한 전법이 널리 적용되였다.

거북선이 선봉에 설수 있었던것은 그의 특수한 구조와 관련되여있었다. 거북선은 등에 철로 장갑을 해씌웠고 그우에 칼과 송곳 등 예리한 날을 꽂아 적이 기여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거북선을 탄 사람들은 장갑안에서 피해를 입을 념려가 없었다. 거북선의 총통구배치와 관련하여 옛 기록에서는 《좌우쪽 패에는 각각 22개의 총통구멍을 뚫고 12개의 문을 내였다. 거북의 대가리에는 우로 2개의 총통구멍을 뚫고 아래로 2개의 문을 내였으며 그 문옆으로 각각 1개의 총통구멍을 뚫었다. 좌우쪽으로 판을 덮은데도 각각 12개의 총통구멍을 뚫었고 <구(龜)>자를 쓴 기발을 꽂았다.》라고 전하고있다. 거북선선수의 룡대가리가 입을 벌리면 류황과 염초를 태운 연기가 적들에게 뿜어져 적들로 하여금 눈을 뜨지 못하게 하고 호흡도 못하게 하였다. 이것은 거북선이 화약무기에 의한 《연막전법》을 세계전쟁사에서 처음으로 창조하고 적용한것으로 된다. 거북선은 또한 적선을 충격하여 파괴할수 있었고 거기에 탄 군사들이 적선우에 뛰여올라가 적을 죽일수도 있었다. 거북선의 이러한 성능은 왜적의 장끼인 단병접전에 대처할수 있었고 적들의 조총으로부터 아군을 보호할수 있었다.

거북선의 위력에 대하여 옛 문헌들에서는 《적을 만나면 새풀을 엮어 우를 덮어서 송곳과 칼을 가린 후 선봉으로 삼는다. 적이 기여오르려다가는 칼과 송곳에 걸리고 가까이 대여들다가는 한꺼번에 총이 쏟아져서 향하는 곳에 적이 감히 당해내지 못하는것이다. 크고작은 전투들에서 이로써 전과를 올린것이 아주 많다.》고 전하고있다.

명나라사람 화옥은 《해방의》에서 《조선의 거북선은 배돛을 세우고 눕히고 마음대로 하며 바람이 거슬러불거나 밀물이 빠지거나 어떻거나 다닐수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참으로 리순신은 거북선을 더욱 발전완성시키고 그에 의거한 위력한 전법을 창조함으로써 세계해전사의 한페지를 빛나게 장식하고 중세수군조사예술발전에 기여하였다.

리순신은 화약무기와 포를 장비한 함선들에 의거한 해상기동전술을 적용하고 완성시켰다.

물론 우리 나라에서 함선에 화포를 싣고 해상에서 기동전을 한것은 그 이전에도 있었으나 리순신은 그것을 더욱 발전완성시켰던것이다.

리순신은 배우에 화포로서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 호준포와 각종 완구, 질려포밖에 승자총통과 신포, 이러한 화포(대포)에서 발사되는 탄환들을 싣게 하였다. 그리고 대장군전, 장군전, 차대전, 피령전, 수철연의환, 단석, 철환, 조란탄, 화전, 대발화 등 무기들도 싣도록 하였다.

그때 왜적들에게는 조총밖에 볼것이 없었다. 그것은 갑판우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살상할수 있을뿐 해전에서는 크게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우리 화포들은 적의 유생력량을 대량 소멸할수 있었고 함선도 파괴할수 있었다. 지자총통과 같은 경우 수철연의환이나 둥근 돌을 재워 발사하면 그 사거리가 10리나 되였다. 이러한 능력은 능히 적의 대선을 뚫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리고 지자총통으로는 조란탄 200개를 동시에 발사할수 있었는데 조란탄은 말그대로 새알만 한 철알들로서 이것은 적의 배우에 밀집한 적들을 대량 살상할수 있었다.

리순신은 이러한 우리 화포의 위력으로 기동전을 조직지휘하여 해전들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둘수 있었다. 그는 자기 본영에 머물러있으면서 기여드는 적과 맞선것이 아니라 대담한 기동작전으로 적을 찾아다니면서 주동적으로 공격하였다.

바다지형과 기상기후에 능통하고있던 리순신은 유인매복전과 기만전술을 많이 적용하였다.

리순신이 유인매복전을 많이 하게 된것은 적들이 대체로 포구에 정박하여있으면서 불리한 경우에는 뭍으로 내빼기때문에 유생력량을 충분히 소멸할수 없었던 사정과 관련된다. 또한 우리 거북선, 판옥선과 같은 배들은 커서 암초가 많고 좁은 포구에서 싸우기에는 불리하였다. 그리고 우리 수군의 전과가 확대됨에 따라 적선들은 우리 함선들만 만나면 도망치려고 하였으므로 어차피 기만전술을 쓰지 않으면 안되였다.

유인매복전술의 대표적인 싸움은 세계중세해전사에서 이름을 떨친 한산도해전이였다.

1592년 7월 8일 아침 우리 수군함대는 적들이 정박하고있는 견내량으로 진격하였다. 그런데 견내량은 해협의 너비가 500m밖에 안되였고 암초가 많아서 우리의 큰 전선들이 싸우기에 불리하였고 기동도 제한되였다. 그리고 적들은 정황이 불리해지면 륙지로 달아날수 있었다.

리순신은 《이곳은 바다가 좁고 물이 얕아서 배를 돌리기 어려우니 거짓 물러서는체 함으로써 적을 유도하여 넓은 바다로 나가서 싸움을 시작하느니만 못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무능한 원균이 흥분된 기세로 곧장 내달아 싸우려고 하였다. 리순신은 《공은 병법을 알지 못하고 이와 같이 한다면 패한다.》고 하면서 자기 배들에 지시하여 뒤로 물러서게 하였다. 적들은 크게 기뻐하며 《패주》하는 아군유인선인 5~6척의 판옥선을 바싹 뒤쫓아왔다.

적들이 좁은 물목을 나온 뒤에 순신이 북을 한번 울리자 배들이 배머리를 돌려 늘어서며 대기하던 배들과 합세하였다. 적들과의 거리는 수십보에 불과하였다.

리순신의 지시에 따라 아군함대는 3척의 거북선을 선두로 학익진을 치고 총공격하면서 적함들을 포위망에 잡아넣었다. 그리고 화약무기로 일제사격을 퍼부었는데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닿을 지경이였다고 한다. 이 싸움에서 적장들인 와끼자까 사요에, 마나베 사마노조, 와따나베 시찌우에몬을 비롯하여 수많은 적장졸들이 물귀신이 되고 적선 59척이 격파되였다. 약 1만명의 적병가운데 살아남은 놈은 1,000명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특징적인것은 적함을 불태워 소멸하는데만 치중하던 종전의 전법과 달리 적함선에 바싹 다가가 갈구리로 끌어당겨 연방 총포, 화살을 쏘면서 적함에 뛰여올라 적장이하 왜놈군사들의 목을 많이 자른것이였다. 물론 당항포, 률포앞바다싸움에서도 그러한 전례는 더러 있었으나 이번처럼 9척이상이나 접현전, 함상전을 겸하여 소멸한적은 없었다. 이것은 우리 수군병사들이 불타는 적개심을 가지고 직접 적들을 요정내려고 하는 투지로 충만되여있었고 전투들을 통하여 육박전을 할수 있을만큼 전투능력도 높아졌다는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통치배들이 전공평가에서 적의 목을 얼마나 잘랐는가 하는것을 중요한 기준의 하나로 삼고 수군들에게도 그렇게 할것을 요구하였던 사정도 작용하였던것으로 보인다.

그후 안골포해전때 리순신은 역시 그곳 지형이 좁고 수심이 얕기때문에 유인작전을 하려고 두세번씩이나 시도하였다. 하지만 한산도해전에서 혼쌀이 난 적들은 유인전에 말려들지 않았다.

리순신은 림기응변의 전법으로 전술을 바꾸어 여러 지휘관들에게 제대식공격(엇바꾸어가면서 공격하는것)을 가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수십척의 적선을 격침, 격파하였다.

리순신은 집중공격의 전법도 썼다.

이 전법은 1592년 9월 1일에 있은 부산앞바다싸움에서 적용되였다. 이 싸움에 대하여 정부에 보고하면서 리순신은 《이번에는 큰 적의 소굴에 400여척의 적선이 늘어선 가운데로 위풍당당하게 뚫고들어가서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기가 꺾임이 없이 온종일 공격하여 적선 100여척을 격파함으로써 적들로 하여금 간담을 서늘케 하였으며 겁에 질려 목을 움츠리게 하였다.》고 자부심에 넘쳐 말했다.

사실 그때 일기조건으로 보나 력량상 대비로 보나 아군에 불리하였지만 리순신은 적들의 약점 즉 조선수군을 두려워하고 일기조건이 나빠 공격하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하고 경계를 소홀히 한 틈을 리용하여 대담한 공격을 조직하였던것이다.

이처럼 리순신은 유인, 포위, 총공격전의 빛나는 모범인 한산도해전과 부산앞바다싸움과 같은 집중공격전 등 위력한 함선에 의한 해상기동작전으로 큰 전과를 올리였다.

리순신은 수군에 의한 륙전대의 조직과 그와 협동하여 항만에 집결한 적에 대한 공격전법을 발전시켰다.

1593년초에 들어서면서 아군은 각 전선에서 전면적인 반공격에로 이행하였다.

리순신이 거느린 조선수군함대의 해상기동작전으로 적들은 기를 못 펴고 포구안에 들어박혀 유인기만전을 해도 걸려들지 않았다.

이런 형세에서 리순신은 경상우도 순찰사 김성일에게 수군과 륙군이 협동하여 적을 칠것을 여러번 촉구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하여 리순신은 수군함대의 력량만으로 상륙전과 해상전을 배합할것을 결심하였다.

이미 의병부대들이 배를 타고 바다싸움을 할수 있도록 준비시켰던 리순신은 여러 장수들과 의논하고 2월 22일에 10여척의 배에 륙전대를 태워가지고 진격하였다. 그리하여 의병부대들은 웅포 서쪽 냉이포해안에 상륙하고 전라우도와 삼도의 용감한 사수들은 웅포의 동쪽 안골포에 상륙하여 각각 진을 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삼도함대에서 각각 경완선(가볍고 빠르며 완전히 전투준비를 한 함선) 5척씩 내여 적선이 줄지어 정박한 곳으로 접근하여 지자, 현자총통을 쏘아 적선들을 한절반 깨뜨리도록 하였다.

바다와 륙지에서 동시에 공격을 받은 적들은 갈팡질팡하다가 숱한 시체를 남기였다. 궁지에 몰린 적장 12명은 물에 빠져 죽을 생각까지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웅천포앞바다싸움에서 륙전대를 상륙시키고 그와 협동하여 적을 공격한것은 우리 나라 전쟁사에서 보기 드문 작전으로서 리순신의 군사적재능을 잘 보여주고있다.

리순신은 1594년 9월말, 10월초 장문포, 명등포전들에서도 륙군과의 협동작전으로 성과를 거두었다.

이밖에도 리순신이 해전에서 적용한 기묘한 책략들은 화공법, 밀물과 썰물의 리용, 쇠줄로 포구를 막는 방어전법, 여러가지 전투서렬의 편성 등 수없이 많다.

이상의 모든 책략들은 바다의 제왕으로서의 리순신의 출중한 군사적지략에 대해서 잘 보여주고있다.

17세기에 활동한 리식은 시장(죽은 사람의 시호결정때 참고로 하기 위해 시호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는 봉상시에 제출되는 문건)에서 《장군(리순신을 가리킴)과 같은분은 국방력이 쇠약해서 군대란 말조차 듣기 어려운 때 천하에서 그보다 더 강할수 없는 적을 상대로 하여 크고작은 수십차례 전투에서 언제나 승리하였으며 서해바다를 막고 앉아 적으로 하여금 물과 륙지로 함께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국토를 회복한것도 이로써 토대를 이루는것이다. 그때 여러 공신들중에서도 장군의 공을 뛰여넘을 사람은 없다. …옛날의 유명한 장수라 해도 그보다 나을수는 없는것이다.》라고 높이 평가했다.

 

3. 승리의 비결 

 

그러면 세계해전사에 특기할만 한 공적을 쌓은 리순신의 성공의 열쇠는 어디에 있었는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가슴속에 깊이 자리잡은 나라와 겨레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였다.

언제나 나라를 생각하는 그였기에 앞으로 왜적이 쳐들어올것이라고 예견하고 싸움준비를 빈틈없이 갖추었으며 왜적들에 의하여 여러 지역이 함락되였을 때 경상도지역으로 출전하여 원쑤를 칠것을 주장하면서 《적의 형세가 맹렬해서 국가가 위급한 이때 다른 도의 장수들에게 책임을 미루고 제 구역만 지키고 앉아있겠다니 말이 되는가… 오늘의 형편으로서는 오직 적을 공격하다가 죽어야 할것》이라고 소리높이 웨쳤던것이다.

원균의 무지로 하여 삼도수군이 패하고 사람들이 모두 신심을 잃고있을 때 리순신은 《우리들이 다같이 나라일을 맡아서 의리상 같이 죽어야 한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한번 죽어서 나라에 공헌하는것이 무엇이 아까우냐. 오직 죽기까지 싸우는것뿐이다.》라고 고무해주었다.

바로 이러한 그였기에 칼에다 자기의 마음속결의를 담아 그는 이렇게 새기였다.

 

  바다 두고 맹세하니

  어룡도 움직이고

  산 두고 맹세하니

  초목도 아노나

 

겨레를 남달리 사랑하였던 그는 언제나 겨레의 운명에 대해 깊은 관심을 돌리였다.

임진조국전쟁의 마지막시기에 있었던 이야기의 한토막을 보기로 하자.

명나라의 수군제독 진린은 적의 뢰물을 많이 받아먹고 도망갈 길을 열어주려고 리순신에게 《유끼나가를 아직 내버려두고 먼저 남해에 있는 적을 토벌합시다.》라고 제의하였다.

리순신은 《남해에 있는것은 모두 포로된 우리 사람이지 적이 아니요.》라고 하였다. 진린이 다시 《적에게 붙은 이상 모두 적이요. 별로 수고하지 않고 적의 머리를 많이 베는것이 좋지 않소?》라고 하자 순신은 격하여 《명나라조정에서 적을 토벌하라고 보낸것은 우리 나라 사람들의 목숨을 구원하자고 해서이다. 이제 포로된 사람을 찾아오지는 않고 함부로 살륙한다는것은 구원의 본뜻이 아니요.》라고 분노를 터뜨렸다.

진린이 마지막에는 화를 내면서 《우리 임금이 내게 장검을 주신것이 있소.》 하며 위협하자 순신은 《한번 죽는것은 아까운 일이 아니다. 내가 대장으로 앉아서 적을 놓아보내고 우리 사람을 죽이는것과 같은 일은 할수 없다.》고 주저없이 맞섰다.

그는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려운 조건에서도 둔전을 설치하고 소금구이, 질그릇제조 등을 하게 하여 생업을 열어주었다.

하기에 그가 원균의 모해로 삼도 수군통제사직에서 철직되고 붙잡혀갈적에 사람들은 남녀로소를 불문하고 길가에 떨쳐나와 울면서 《사또께서 어디로 가십니까. 우리들은 이제는 죽었습니다.》 하며 눈물을 흘렸던것이다. 그리고 그가 다시 삼도 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여갈 때에 길에서 만난 피난민들중의 젊은 사람들은 처자들에게 《우리 장군이 오시니까 인젠 너희도 죽지는 않을것이다. 천천히 나를 찾아오라. 나는 먼저 우리 장군을 따라서 가겠다.》고 말하였다.

바로 이것이 그가 성공하게 된 비결의 하나였다.

리순신은 장병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여 그들모두의 운명에 대해서도 항상 책임지는 립장을 견지하였다.

리순신이 한산도에 있을 때 집 한채를 지어놓고 운주당이라고 하였다. 그는 밤낮 거기에 있으면서 모든 장수들과 전투에 대한 일을 상의하였으며 아무리 낮은 병졸이라도 군무에 대한 말을 하겠다고 하면 언제든지 와서 보고할수 있게 하여 군사들의 실정에 통달하였다. 싸움을 하려고 할 때마다 막하장수들을 모두 불러 계책을 의논하고 의견이 결정된 다음에 싸웠기때문에 싸움에서 한번도 패한적이 없었던것이다.

그는 광양현감 어영담이 억울한 루명을 쓰고 파직당하게 되였을 때 그를 적극 비호해주고 부산포해전에서 죽은 록도만호 정운의 죽음을 통분해하면서 직접 제문을 짓고 복수를 다짐하기도 하였다.

그는 군대를 지휘함에 있어서도 간단명료하게 하고 법을 세워서 한사람도 함부로 죽이지 않았다. 그래서 전체 군사가 한마음으로 뭉치여 누구도 감히 명령을 어기지 못하였다고 한다.

장병들을 믿고 사랑하며 그들의 운명에 대해서도 책임져주는 그의 고상한 의리심이야말로 그에게 백승을 가져다준 승리의 비결이였다.

리순신은 원쑤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을 지니고있었다.

그는 아름다운 조국강토를 짓밟은 원쑤 왜적을 끝없이 증오하면서 《한놈의 목을 자를 동안에 여러 놈을 쏘아죽이 라. 모가지를 벤것이 적은것을 걱정하지 말고 쏘아서 맞히는데 노력하라.》고 지시하였다.

임진조국전쟁의 마지막시기 순천 왜교(예다리, 왜다리)에 포위되여있던 고니시 유끼나가의 부대는 사천, 고성방면의 저들의 수군부대에 구원을 청하는 한편 퇴로를 열어보려고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에게 뢰물을 보내여 리순신에게 압력을 가하도록 하였다. 리순신은 《국가의 원쑤는 놓아보낼것이 못된다.》고 하여 진린을 무색하게 하였다. 왜놈들이 이번에는 리순신에게 총, 칼 등 물건들을 바치면서 퇴로를 열어달라고 애걸하자 《내가 임진년이래 적을 잡은것이 무수하고 로획한 총과 칼은 산더미 같다. 이제 원쑤와 사사로운 교섭을 해서는 무엇하느냐?》고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출전에 앞서서는 하늘을 향해서 《이 원쑤놈들만 없애치우면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고 빌었다고 한다.

원쑤들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 바로 이것이 그가 성공할수 있게 한 비결의 하나였다.

헌신적인 투쟁정신, 이것 역시 그의 승리의 요인이였다. 그와 관련해서는 많은 일화들이 있지만 운명을 건 싸움이라고도 할수 있었던 명량(울돌)해전만을 들어보자.

원균의 패전으로 리순신이 넘겨받은 전선은 겨우 12척에 불과하였다. 조정에서도 우리 수군이 너무 미약해서 적을 방어하기 불가능하다고 여기여 리순신에게 륙지에 올라와서 싸우라고 명령하였다. 리순신은 수군을 페지하는것은 적이 바라는것이라고 하면서 전선이 비록 적더라도 끝까지 싸워볼 자기의 결의를 피력하였다.

리순신은 유리한 지점을 차지하고 자연기후조건을 리용하여 결사전을 벌리기로 하였다. 그는 함선수가 적은것을 고려하여 물고기잡이배들을 싸움배로 위장시켜 함대의 뒤에 배치하고 여러가지 방어조치들도 취하였다.

1597년 9월 16일 이른아침 330여척의 적선이 바다를 메우며 밀려왔다. 이에 비하면 우리 함선은 겨우 12척, 세계해전사에 일찌기 있어본적이 없는 싸움이 시작되였다.

여러 장수들이 도망칠 잡도리를 하였다. 리순신은 죽을 때까지 싸우기로 결심하고 한복판에다가 닻을 내리였다. 적들의 배가 리순신의 배를 포위하였다. 뭍에서 광경을 목격하던 피난민들은 우리들은 통제사를 믿고 왔는데 이제는 어디로 가야 사느냐고 하면서 통곡하였다.

리순신은 장검을 비껴들고 군사들을 고무하면서 도망치려는 거제현령 안위와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를 부르며 《정말 군률로 죽고싶으냐. 뒤로 물러가면 살데가 있느냐.》고 꾸짖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안위가 적선을 향해 맹렬히 공격하였다. 리순신은 그의 배가 포위에 들자 즉시 그를 구원해주었다. 적장 마다시가 뒈지고 적선 세척이 격파되자 적들의 사기가 떨어졌다. 때마침 썰물이 시작되여 적선은 더 전진하지 못하고 바다물에 밀려 퇴각하게 되였다. 아군은 이때를 리용하여 일제히 북을 치면서 전진하여 총포와 활을 쏘았는데 그 소리는 천지를 진감하였다. 우리 수군은 이 싸움에서 적함선 30척을 깨뜨리였다. 근 30배나 되는 적과 맞서 싸워 이긴 리순신을 사람들은 더욱 신뢰하게 되였고 명나라원군의 장수들도 찬탄을 마지 않았다.

임진조국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한 로량해전때에도 리순신은 직접 북을 메고 전투지휘를 하다가 적탄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그는 매일 밤 직접 활과 화살을 수리하였으며 전투때에는 앞장에 나서서 활을 쏘군 하였다. 장병들이 왜 국가를 위해서 자중하지 않는가고 걱정하면 어떻게 자네들더러만 적과 싸우라고 하겠는가고 하면서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던것이다.

  




이러한 헌신적인 투쟁정신이야말로 그가 성공할수 있게 한 또 하나의 요인이였다.

리순신은 뛰여난 군사적재능을 가진 선견지명있는 전략가, 림기응변할줄 아는 작전가였다.

그가 전쟁전이나 휴전기간에 항상 싸움준비에 힘을 넣은것은 그가 멀리 앞을 내다볼줄 알았다는것을 말해준다.

휴전기간에 있은 일이다. 리순신은 놈들의 재침책동을 예리하게 주시하면서 략탈행위에 대해서는 제때에 응징하였다.

그는 명나라 선위도사부의 담종인이라는 자가 일본의 장수들이 다 명나라에 귀순할 생각이 있고 무기를 걷어가지고 제 나라로 가겠다고 하니 조선수군은 각각 일본인들의 영채에 가까이 오지 말고 본래의 장소로 되돌아가서 충돌을 피하라고 한데 대하여 이렇게 준렬히 규탄하였다.

《왜인들이 웅거하고있는 거제, 웅천, 김해, 동래 등지가 모두 우리 국토인데 우리더러 일본군대의 진영에 접근하지 말라는것은 무엇이며 우리더러 속히 본래 있던 지방으로 돌아가라니 돌아갈 지방이 어데 있단 말인가. 싸움을 일으킨것이 우리가 아니라 왜놈이다. 일본놈은 가지가지로 간사하고 변하기를 잘하여 옛날로부터 신의를 지키였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다. 저 흉악한 무리들이 아직도 죄악을 겁내지 않고 연안지방에 웅거해서 여러해째 물러가지 않으며 각처로 돌아다니면서 백성을 살해하는것이 전보다 더하다. 군기를 걷어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이 과연 어디서 나타나는가. 지금 화친하자고 하는것도 실상 사기와 허위의 행동 같다.》

이것은 리순신이 적들의 간교한 계책을 꿰뚫어보고있었다는것을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리순신은 적정을 정확히 판단한 기초우에서 정황에 맞게 전투계획을 작성하였다. 항상 척후를 파견하여 적들의 동태를 살피게 하였으며 적들의 전투방법과 우리 나라의 바다지형, 자연기후적조건을 타산하고 또 정황이 달라지는데 맞게 새로운 전법을 적용하여 싸움을 승리에로 이끌었다. 그는 항상 경계를 엄밀히 하여 평소에는 물론 잠자리에서도 지휘기구인 북을 베고 선잠을 잤다. 더우기 융복(군복)을 벗어본 일이 없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어서도 전투구상을 하였다.

어느 날 밤 잠 못들어 설레던 그가 지은 한시 《한산섬》은 오늘도 그의 뜨거운 애국의 마음을 전해주며 불리워지고있다.

 

  물나라 가을빛이 어느덧 저물어라

  높이 뜬 기러기떼 추위에 놀랐고나

  밤새워 속태우며 이리저리 뒤척일제

  지새는 저 달만이 활과 칼 비치여라

 

사람들은 그가 적들이 야습해오리라는것을 미리 알고 방비대책을 세워 물리친 사실을 놓고 《귀신》같은 사람이라고 존경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마련된 전과인가를 아는 사람은 당시 그리 많지 못하였다. 척후를 멀리 내보내여 적의 움직임을 살피게 하고 밤새워 전투구상을 하며 항상 경계를 엄밀히 하여 적이 오는것을 먼저 안 까닭에 이룩된 성과들이였다.

리순신의 강직하고 청렴결백한 성격은 그가 군중의 신망을 얻게 하고 군사가로서 성공할수 있게 한 요인의 하나였다. 그의 이러한 성격과 관련해서는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오는데 그가운데 일부를 보기로 하자.

일찌기 리순신이 옥에 갇히웠을 때의 일이다. 한 옥사쟁이가 그의 조카 분에게 은밀히 뢰물만 먹이면 죽음을 면할수 있다고 귀띔하였다. 그 말을 들은 순신은 분을 꾸짖으면서 《죽으면 죽을지언정 어찌 원칙을 굽혀가면서 삶을 구할수 있으랴.》고 말했다. 하여 당시 사람들은 순신이 말이 적고 별로 웃지도 않으며 얼굴이 단아하고 근신하는 선비 같지만 심중에는 담력이 있었다고 감탄하였다.

리률곡(리이)이 리조판서로 있을 때였다. 그때 률곡은 리순신의 이름을 듣고 또 일가간인것을 알고 서애 류성룡을 통하여 만나보기를 청하였다. 성룡 역시 가보라고 하였다. 하지만 리순신은 률곡과는 일가간이니까 만나보아도 좋지만 벼슬을 내고 들이고 하는 그런 자리에 있을 때 가보는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끝내 가보지 않았다.

리순신이 발포만호로 있을 때 좌수사 성박이 관청 뜰앞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여가려고 하였다. 그러자 리순신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것은 공적물건이나이다. 심은지 여러해 된것을 하루아침에 베여버리면서 그것도 공용이 아니요 개인용이라면 말이 되옵니까.》 수사가 성을 내였으나 결국 오동나무를 베여가지 못하였다.

그가 얼마나 청렴결백하게 살았는가는 1579년 충청병사의 군관으로 임명되였을 때의 이야기를 통해서 잘 알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그때 리순신이 거처하는 방에는 아무것도 없고 있는것이라고는 옷과 이불뿐이였다. 자기 집에 갈 때에는 반드시 식량맡은 사람을 불러서 나머지의 식량을 돌려주었다. 충청병사도 이 이야기를 들은 뒤부터는 특별히 사랑하고 존경하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바로 이런 사람을 따른다. 그가 비록 높은 관리들에게 아부하지 못하여 그처럼 뛰여난 재능을 가지고도 출세하지 못하였지만 군중은 오히려 그의 고결한 넋을 크게 샀으며 그의 명령에 충실하였던것이다. 승리는 평소에 쌓아둔다고 한 말은 아마도 이 경우를 두고 한 말일것이다.

나라와 겨레에 대한 사랑, 장병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는 고상한 풍모, 원쑤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 헌신적인 투쟁정신, 선견지명있는 지략과 림기응변의 전술, 강직하고 청렴결백한 품성, 이 모든것은 바로 리순신이 군사가로서, 명장으로서 성공할수 있게 한 비결이였다. 

 

4. 명장에 대한 찬탄 

 

《통제사(리순신)는 천지를 품속에 넣을수 있는 재주와 하늘을 꿰여매고 해를 씻은 공로가 있소이다.》

이 말은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이 리순신을 높이 평가하여 한 말이다.

1598년 7월 16일에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이 수군 5,000명을 거느리고 조선수군과 협력하기 위하여 왔다. 그런데 진린의 성격이 사납고 까다로와 남들과 흔히 틀리기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그를 꺼리였다. 류성룡을 비롯한 관리들은 리순신부대가 진린의 전횡때문에 패하지 않겠는가고 우려하였다.

리순신은 진린이 오게 된다는 말을 듣고 군사들로 하여금 천렵과 사냥을 하여 사슴, 메돼지, 생선들을 굉장히 많이 잡아서 술과 안주를 푸짐히 준비하여놓고 그를 영접하였다. 명나라의 여러 장병들은 기뻐하면서 《리순신은 과연 훌륭한 장수이다.》라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진린도 내심으로 기뻐하였다.

며칠후 적의 배가 부근섬에 침범해오므로 순신이 군사를 보내여 쳐부시고 수십명의 적병의 목을 잘랐는데 그것을 전부 진린의 공로로 해주었다. 록도만호 송여종이 어처구니없어하자 순신은 《적의 썩은 모가지야 명나라사람들에게 준들 그 무엇이 아까우랴. 너의 공은 내 장계에 있다.》고 하였다.

진린은 리순신을 더욱 존경하면서 일체 문제를 그와 의논하였고 나갈 때에는 그와 가마를 나란히 하여 앞서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명나라군사들속에서 우리 백성들을 략탈하는 행위가 나타나자 리순신은 진린에게서 그들에 대한 처벌권한까지 넘겨받아 우리 군사들과 다름없이 백성들의 실 한오리라도 빼앗는 자가 있으면 잡아다가 곤장을 안겼다.

진린은 리순신의 군사를 다루고 전투를 지휘하는 모습을 보면서 더욱 감탄하여 그를 보통때도 리야(중국말로 친근감을 담고있는 존칭어)라고 부르며 존경하였다. 그리고 전투때에는 우리 판옥선에 옮겨타고 리순신의 밑에 서기를 좋아하였으며 자기 군대의 지휘권까지도 넘겨주었다.

로량해전때 리순신이 전사하자 그의 큰아들 회와 조카 완은 그것을 비밀에 붙이고 전투를 지휘하여 포위에 든 진린의 배를 구원해주었다. 전투가 끝난 후 크게 사례하려던 진린은 그가 전사하였다는 말을 듣고 세번 거퍼 넘어지더니 크게 울면서 《죽은 후에까지 나를 구해주었구려.》 하고 말하고 또다시 가슴을 치며 슬퍼하였다. 명나라의 수군들은 모두 고기를 내던지고 먹지 않았다. 후에도 진린은 리순신을 잊지 못해하였다.

이처럼 리순신의 뛰여난 군사적재능과 다정다감한 인간미, 능란한 외교술은 제노라던 진린을 머리숙이게 하고 진심으로 존경하게 하였다.

리순신의 군사적명성은 오래도록 국내외사람들속에 전해져내려왔다. 외국의 어느 한 학자는 자기의 저서에서 한산도해전을 평하면서 《조선의 제독 리순신은 적이 도주할것을 념려하여 직접 공격작전을 포기하고 노를 저어 후퇴하는것 같이 기만전술을 썼다. 이 전략은 완전히 성공하였다. 일본제독은 도주한다고 생각되는 적을 잡기에 바빠 전투함선들을 진격시켰다. 리순신제독은 너무 빨리 후퇴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적선들이 나란히 서도록까지 유도하였다.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이 제독은 쾌속정으로도 적선에 접근하기 힘들었을지 모를 일이였다. 그때 위기에 처한 순간에 큰 노를 저어서 함선들이 모두 16점의 침로를 취하게 하여 일본추격선에 공격을 가하였다.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이 기동이 지상에서는 간단한것으로 생각될지 모르나 해군전문가만이 이 기동은 훈련을 쌓은 숙련된 함대의 표준이라는 판단을 내릴수 있을것이다. 이때 조선전함들은 충각으로 적선을 쳐서 격파하는것으로 공격을 개시하였고 리순신은 또 무적의 기함에 직접 승선하여 일본함대를 꼼짝 못하게 쳐부시며 짓쳐들어갔다. 다른 함선들도 역시 그렇게 하였고 적의 선봉선은 힘이 모자라 저들 함선이 후원하기 전에 침몰되고말았다. 이 선회작전에 있어서 많은 적선들이 침몰되였고 전진해오는 조선군 배머리에 그들의 배전은 로출되여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이 승리는 위대한 조선제독의 더이상 있을수 없는 공훈이였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로일전쟁(1904-1905년)당시 짜리로씨야의 발찍함대를 조선남해에서 격파한것으로 하여 일본에서 군신(군사를 《귀신》처럼 잘 알고 적용하는 인물이라는 뜻)으로 떠받들리운 도고라는 자가 있었다. 어느 한 모임에서 그는 1805년 트라팔가르해전에서 프랑스-에스빠냐련합함대를 격파하여 명장으로 알려진 영국의 해군제독 넬슨에 대비할만 한 인물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그러자 그는 《칭찬을 받아서 고마우나 나로서 말한다면 넬슨이란 그리 대단한 인물이 아니다. 진짜 군신이란 칭호를 받을만 한 제독이 있다면 그것은 리순신쯤으로 될것이다. 리순신에 비한다면 나는 하사관축에도 들지 못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하였다.

1905년 5월에 일본의 련합함대가 짜리로씨야의 원정함대를 크게 격파하고 승리한 해전은 세계해전사에서 유명한 해전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것은 쌍방의 력량이 비슷한데다가 로씨야함선들의 흘수선이하부분이 높은 염도로 하여 수면으로 드러나 좋은 사격목표로 되였던 불리한 조건에서 진행된 전투였다. 따라서 리순신에 대한 도고의 찬사는 진정으로부터 우러나온것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참으로 리순신은 나라에 준엄한 시련이 닥쳐온 시기에 자기의 지혜와 생명까지도 서슴없이 바쳐 조국과 겨레를 보위하고 후세에 길이 남을 공적을 쌓은 애국명장이며 자랑스러운 민족의 아들이였다.

 

               37)명장을 천거한 류성룡 

 

류성룡(1542-1607년)의 자는 이현이고 호는 서애이며 본관은 풍산이다. 그의 아버지는 관찰사 중영이였고 강직하다는 평을 받았다.

류성룡은 1542년 10월 2일 경상도 의성현 사촌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하여 6살때 벌써 《대학》을 배웠으며 젊은 시절에 경상도 도산에 가서 퇴계 리황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류성룡은 156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 부정자, 홍문관 부수찬, 부제학, 상주목사, 경상감사, 례조판서, 대제학, 리조판서, 우의정, 령의정 등 중앙과 지방의 벼슬을 력임하면서 선조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는 강관으로 있을 때 임금의 물음에 응대하는것이 명백하고 론리적이며 의리가 분명한것으로 하여 당시 첫째가는 강관으로 임명되였다.

1585년 5월에 의주목사 서익이 류성룡을 큰 간신이라고 비난하였을 때 선조왕은 《류성룡도 군자이다. 내 생각에는 오늘날의 큰 현인이라고 말하여도 일없다고 본다. 그 사람을 보건대 함께 이야기해보게 되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속으로 탄복하는 때가 많다. 학식과 기상이 이와 같은데 큰 간신일리가 어디 있는가. 어떤 담이 큰 사람이 감히 이런 말을 하는가.》고 하였다. 류성룡이 선조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는것은 1589년 12월에 전라도의 유생 정암수 등이 그를 역적 정여립일당의 죄행을 제때에 바로잡지 못했다고 비난하였을 때 그를 옹호하고 다음다음날에는 특별지시로 리조판서로 임명한 사실로써도 잘 알수 있다. 선조왕은 1590년 11월에 류성룡을 우의정으로 임명하고 다음해 1월에는 특별지시를 내려 관리임명을 맡아보는 리조판서직을 겸임하게 하였다.

그는 임금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명장 리순신을 천거하고 임진조국전쟁기간에는 전쟁전반을 돌보면서 일본침략자들을 몰아내고 전쟁의 승리를 이룩하는데 일정하게 기여하였다.

  

1. 군사상의 공적 

 

류성룡이 군사상에 이룩한 가장 큰 공적은 무엇보다도 명장들을 천거한것이다.

전투에서 지휘관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리조시기에 들어와서 문존무비를 국책으로 내세우며 문관들을 우대하고 지방의 군무를 보는 장수들조차 문관으로 임명하다나니 군력은 많이 쇠퇴하였다.

왜놈들의 해외침략위험이 날로 증대되고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이 거의 기정사실화되여가던 그때 군사에 밝은 훌륭한 인재를 천거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함으로써 앞으로의 사태에 대처하는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였다.

류성룡은 선견지명의 안목을 지닌 정치가로서 이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통절히 느끼고있었으며 미룰수 없는 과제로 여기고있었다.

당시 그에게는 자기의 결심을 실현할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갖추어져있었다.

그무렵 통치층내에서는 당파싸움이 열기를 띠고있었다. 서인과 동인의 싸움이 치렬한 속에 서로 자파세력확장에 혈안이 되여있다나니 무능한 자도 큰놈만 업으면 인재가 되여 좋은 자리를 얻을수 있었다.

퇴계 리황의 문하에서 배운자들속에서 동인이 많았는데 이것으로 하여 류성룡도 자연히 동인의 대렬에 끼우게 되였다.

1591년 서인의 우두머리였던 정철이 류배를 간 후 동인의 한사람인 리산해가 령의정이 되고 류성룡이 우의정으로서 리조판서를 겸하게 됨으로써 조정의 요직은 동인이 쥐게 되였다.

류성룡은 일본에 갔던 통신사로부터 정세보고를 듣고 방비문제를 위하여 밤낮 걱정을 하였으며 령의정과 한자리에서 일본의 침략이 있겠는가 없겠는가를 론의할 때 《내 생각에는 왜병이 반드시 침략할터이니 대책이 있어야 한다.》고 강경하게 주장하였다.

류성룡은 방비대책의 일환으로 진관제도를 다시 복구할것을 제의하는 한편 임금에게 유능한 장수를 요충지에 배치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임금이 동의하자 그는 장수감으로서 리순신을 추천하였다.

정읍현감으로 있던 리순신은 진도군수로 전임되였다가 부임하기 전에 가리포진 수군첨절제사로, 미처 부임도 하기전에 다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였다.

사간원의 관리들이 리순신의 《순서를 뛰여넘는》 임명을 놓고 취소할것을 제의하였지만 선조왕은 류성룡을 믿었고 리순신의 재능도 어느 정도 알고있었던지라 고쳐 임명할수 없다고 딱 잘라 대답해주었다.

리순신이 바다의 제왕으로서 한산도 앞바다, 부산포, 명량해협, 로량해전들에서 크게 승리하고 나라에 닥쳐온 엄중한 위기를 가시는데 기여한것은 명장을 추천한 류성룡의 공적과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다.

류성룡은 리순신의 운명도 극력 지켜주었다.

리순신의 공을 시기한 자들이 임금에게 계속 모함하는 말을 하여 선조왕도 그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였다. 한번은 선조왕이 류성룡에게 이렇게 물은적이 있었다.

《도대체 리순신은 어떤 사람인가. 근신들이 모두 그가 싸움을 잘하지 못하고 일본수군을 무서워한다니 어찌된 일인고?》

이에 대하여 류성룡은 《순신은 제 동네사람이옵니다. 신은 어릴 때부터 그를 잘 알고있사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꼭 대장이 되겠다고 하였사옵니다. 그는 글도 잘할뿐아니라 남에게 굽히지 않는 성격을 가지고있사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조선수군을 해치려는 왜놈들의 간계와 권력욕에 환장한 원균의 모함, 그와 결탁한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의 참소에 의하여 리순신이 삼도 수군통제사자리를 내놓고 사형까지 당할 처지에 놓이게 된적이 있었다.

당시 전쟁상황에서도 통치배들사이에는 당파싸움이 격렬하게 벌어지고있었다. 류성룡은 그때 동인에서 갈라진 남인의 령수라는 혐의를 받고있었던지라 자기가 개입하면 당파의 립장을 대변하는것으로 될가봐 주저하였다. 더구나 그의 성격이 원래 근신하고 온건한 태도를 유지하는것이였던지라 나서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미 우의정인 리원익이 리순신을 비호하는 립장을 취하였으므로 류성룡은 판중추부사 정탁(1526-1605년)을 내세웠다.

정탁은 《리순신은 명장이라 죽여서는 안되옵니다. 군사상의 리해관계는 멀리서 생각하기 어려운것인바 그가 진격하지 않은것은 필시 짐작이 있었을것이니 관대하게 용서하여 뒤날 공을 세우도록 하기 바라옵니다.》라고 제의하였다. 결국 리순신에 대한 사형은 철회되고 백의종군하게 되였다.

류성룡은 리순신만이 아니라 권률도 천거하였다.

권률은 임진조국전쟁시기 리치와 행주에서 큰 승리를 이룩함으로써 명장으로서의 명성을 떨치고 후에는 오래도록 도원수직을 맡아보면서 전쟁의 승리에 기여하였다.

이밖에도 류성룡은 전쟁중에 리일, 신립, 고언백, 김응서, 정문부 등 장수들을 천거함으로써 전쟁승리에 결정적역할을 하였다.

류성룡의 군사적공적은 다음으로 왜놈의 간첩들을 잡아없앤것이다.

왜놈들은 전쟁초기 아군의 여러 진영들에 간첩들을 묻어놓고 군사기밀을 렴탐하고있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1592년 11월 18일 류성룡이 안주에서 군관 성남을 시켜 전령을 가지고 수군장 김억추에게로 가서 어떤 일을 처리할데 대한 밀약을 하려고 하였다. 그때 성룡은 성남에게 《엿새안으로 회답을 보내게 하라.》고 당부하였는데 기일이 지나도 회답이 오지 않았다.

류성룡은 몹시 의심스러워하면서 다시 지시를 내려 문책하였다. 그런데 그는 이미 22일에 우방어사가 있는 곳에서 공문을 작성하여 보냈다는것이였다. 결국 중간에서 행처불명이 된것이였다.

류성룡은 그러지 않아도 적들이 최근에 우리 나라의 모든 정형을 미리 알고있고 지어는 산천의 형세와 도로형편, 행군날자까지 모르는것이 없으므로 어떤 간악한 자들이 적의 앞잡이로 되지 않았는가 하여 의심하던터였다.

그는 연줄을 따라 조사하여보았다. 공문을 가지고 나온 자는 삼화수군 김순량이라는 자였다. 그자는 《공문과 전령은 숙천에 있는 원수에게 바쳤고 또 거기에서 비밀공문을 받아가지고 가다가 도중에서 한사람을 만나 그와 함께 평양성안으로 들어갔더니 적장이 공문을 보고 찢어버렸으며 저는 이틀동안 그곳에서 묵은 다음 소를 끌고 성밖에 가서 풀을 베다가 그 기회에 도망쳐왔소이다.》 하고 횡설수설하였다.

그의 말이 너무 황당하여 류성룡은 자기가 직접 끌어다놓고 곤장을 치게 하며 사실을 자백하게 하였다. 그제서야 그자는 《제가 7월에 포로로 잡혀 평양으로 끌려갔는데 성안에 왕래하다가 삼화고을의 관노 막동이와 평양 사노 서한룡 그리고 잇복 등과 함께 동류 40여명과 결탁하였소이다. 모두 적의 앞잡이가 되여 처음부터 드나들면서 우리 나라의 사정을 렴탐하기 위하여 어떤 진영에든지 안 가는데가 없이 싸다니였는바 그가운데서도 순안지방을 더욱 많이 왕래하였고 안주와 의주 등지에도 왕래하는 자가 있소이다. 저는 처음 우방어사에게서 전령과 공문을 받아가지고 곧바로 평양으로 들어갔더니 적장이 공문을 보고는 찢어버리고 전령을 자기가 받아둔 다음 이어 서한룡 등에게는 명주 5필을, 저에게는 소 한마리를 상으로 주어 다시 들어오도록 하였소이다. 서한룡은 대략 초열흘께 나와서 정탐을 하게 될것이옵니다.》라고 자백하였다.

깜짝 놀란 류성룡은 간첩들이 이렇게 여러곳에 싸다니도록 모르고있은 자기를 질책하며 간첩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한 비밀대책을 세웠다.

잇복이라는 자가 우방어사의 매복군사에게 잡혔다. 류성룡은 각 진지들에 비밀통지를 보내여 감시사업을 더욱 철저히 하도록 하며 간첩들을 모두 체포하게 하였다. 하여 적지 않은 간첩들이 체포되였다.

안주성밖에서 순량의 목을 베였다는 소문을 듣고 살아남은 놈들도 모두 얼혼이 나가 흩어져 몸을 숨기였다.

간첩들을 체포하고 모두 숨어버리게 한 군사적의의에 대하여 류성룡은 이렇게 보고하였다.

《그후 얼마되지 않아 명나라군대가 청천강을 건넜지만 적들은 대군이 이르는것을 알지 못하고… 이튿날 평양을 진격포위하여 성공할수 있었다. 만일 적의 간첩이 그때까지 있어서 미리 준비를 하였다면 일이 어떻게 되였을는지 알수 없었을것이니 간첩이 군사기밀에 주는 영향은 이러한것이옵니다.》

이처럼 류성룡은 간첩의 위험성을 제때에 인식하고 미리 대책을 세워놓음으로써 아군이 평양성을 탈환하고 이후 전과를 확대해나가는데 기여하였다.

류성룡의 군사적공적의 다른 하나는 훈련도감의 창설을 발기하고 지도함으로써 우리 군사의 질적수준을 높이고 강대한 적과 맞서 싸울수 있도록 준비시킨것이다.

류성룡이 전쟁과정을 통하여 통절하게 느낀것은 왜놈들이 우수한 조총으로 무장하였고 또 단병접전을 잘하는 조건에서 적들의 이러한 장끼에 대처하자면 잘 훈련된 군사를 준비시켜야 한다는것이였다.

류성룡은 1593년 4월 임금에게 장계를 올려 군사를 훈련시킬데 대하여 제의하였다. 그리고 그는 서울안에서 모집한 70여명에게 밤낮으로 무기쓰는 기술을 익히게 하였다.

선조왕은 비변사에 명령하여 도감을 설치하고 윤두수로 하여금 그 일을 맡아보도록 하였다가 1593년 10월에 류성룡을 도감의 도제조로 임명하였다.

류성룡은 큰돌을 들고 담장을 뛰여넘을수 있는 자들을 도감에 받아들이게 하였다고 한다.

도감이 제도적으로 완비된것은 1594년이였다고 보인다. 도감에 입대한 장정들로서는 유생, 한량, 량인, 아전, 공노비, 사노비 등 각계각층이였는데 다수를 차지한것은 량인과 노비신분의 장정들이였다.

류성룡은 필요한 포수와 살수의 수를 채우기 위해 도감에 소속된 화포군으로서 재주가 뛰여난 자들가운데서 관노, 사노는 량인으로 만들고 량인인 경우에는 금군으로 임명한다는 명령을 선조왕의 허락을 받아 하달하였다. 이 제의를 귀띔한것은 류성룡이 데리고 다니던 반당(시중군)이였다고 한다. 그러자 량인으로 되려는 노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미 훈련도감에 속해있던 노비들의 훈련열의도 높아졌다.

훈련도감이 창설된지 1년도 못되여 그 수는 몇천명에 달하였다.

류성룡은 조총사격연습에 깊은 주의를 돌리고 필요한 화약을 해결하기 위해 적들에게 복무하였던 군기시의 대풍손이라는 자를 특별히 용서해주는 조치도 취하였다. 그자는 감격하여 열성껏 일하였다. 하여 하루에 몇십근씩 생산되는 화약을 각 부대에 분배하여 밤낮 사격연습을 시켜 우수하고 락후한 순서로 상벌제도를 수립하였는데 한달쯤 지나서는 날아가는 새도 맞히였다. 1594년 8월 항복한 왜병 38명을 데려다 조총사격을 시켰는데 과녁을 맞힌 자가 2명이고 나머지는 다 맞히지 못하였다. 명중시킨 자도 우리 나라 포수들보다 훨씬 못하였다.

류성룡은 선조왕에게 글을 올려 군량대책을 세우고 군대를 더 모집하여 1만명을 채워 병영 다섯을 두고 한영에 2,000명씩 소속시키고 해마다 반수는 서울에 남아 훈련하며 반수는 시외에 나가 공지를 골라 둔전을 운영하고 곡식을 저장하여 번갈아 몇해만 계속하면 군대와 군량의 원천이 풍부해지고 나라가 튼튼해질것이라고 제기하였다. 선조왕은 그럴듯이 여겨 병조에 내려보냈으나 질질 끌며 즉시 집행하지 않아 결국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류성룡의 노력과 도감에 소속된 군인대중의 열의에 의하여 훈련도감의 군사는 질적으로나 량적으로 강화되였다. 국왕자신도 《이것은 우리 나라에서 일찌기 있어보지 못한 군사이다.》라고 하면서 몹시 기뻐하였다.

훈련도감의 창설은 중세군사제도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무엇보다도 봉건국가의 급료에 의해 유지되는 직업적상비군이 출현했다는것이다.

훈련도감의 군사는 또한 파총, 초관과 같은 고정된 지휘관들의 일상적인 지휘를 받음으로써 전투력이 더욱 강화되였다. 이러한 군대를 속오군(고정된 군인들이 대오에 배속되여있는 군대)이라고 불렀다. 지방들에서도 속오법에 의하여 부대들이 편성되였다.

그리고 훈련도감의 군대에서는 검과 창으로 무장한 살수와 활을 가진 사수, 총으로 무장한 포수 등으로 명백히 구분되여있었으며 해당 병종의 부대들에서는 전문적인 훈련이 실시되도록 되여있었다.

중앙군과 지방군에서 속오법이 적용되면서 병종이 구분되고 화력무기의 의의가 강화됨에 따라 전투서렬편성과 전법에서도 변화를 가져오게 되였다. 이전에는 전투서렬에서 병사들이 어깨가 맞닿게 대렬을 짓는 방진밀집서렬을 적용하였다면 새로 편성된 속오법에서는 아직 밀집대형의 테두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지만 병사들사이의 간격을 넓게 두는 소산대형(오늘날의 산개대형과 비슷한것)으로 점차 넘어가게 되였다.

이것은 화력무기가 출현한 조건에서 피해를 덜 받도록 전투대형이 고쳐진것이다. 또한 전투방법에서도 무장장비에 따라 병종이 구분되여있었으므로 공격해오는 적이 먼 거리에 있을 때에는 먼저 조총을 쏘고 그다음에는 활을 쏘며 가까운 거리에 오면 창과 칼로 무장한 살수들이 주로 적과 맞붙어 싸우게 되여있었다.

훈련도감이 설치되고 조총, 칼, 창 등의 무기를 익힐데 대한 여러가지 장려조치가 취하여지자 전국의 인민들속에서는 그 무기에 정통하려는 열의가 급속히 높아졌다.

1597년 12월말부터 1598년 1월초사이에 벌어진 아군련합군의 울산성공격시에 훈련도감군의 투쟁모습을 목격한 명나라장수들은 훈련도감의 군사 1,000명은 명나라군사 5,000명보다 낫다, 포를 쏘는 절강군사들보다 뛰여나게 우수하다고 평가하였다. 포를 쏠줄밖에 모르는 절강군사들에 비하여 훈련도감의 군사들은 말달리기, 활쏘기, 포쏘기 등 여러 무술에 모두 능했기때문이였다.

이처럼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우리 나라 군대를 량적으로 장성시키고 질적으로 강화하여 그 전투력을 높인것은 류성룡의 군사적공적이라고 할수 있었다.

이밖에도 류성룡이 전쟁전반을 맡아본 수석대신으로서 임진조국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기여한 군사적공적들은 적지 않다.

그는 대중이 전쟁에서 노는 역할을 깊이 인식하고 대중의 힘을 불러일으킬것을 주장하였으며 적아간의 력량관계와 준비정도를 고려한데 기초하여 《적과 싸우는데는 구름처럼 모였다가 새처럼 헤여져서 경쾌한것이 제일이다.》고 하면서 우리 나라의 지형을 잘 리용하여 싸울데 대한 전술적인 방안들도 제시하였다.

그는 또한 강한 인내력으로 외교문제를 능동적으로 해결함으로써 조선과 명나라군이 합심하여 공동의 적인 왜적을 쳐물리치도록 하였다. 그는 명나라군이 단독으로 일본침략군과 강화담판을 벌려놓으면서 조선군대는 꼼짝 말고 있으라고 하자 그것을 견결히 반대하면서 거만한 명나라장수들과 맞섰다.

령남사람들은 매사에 꼼꼼한 그를 두고 《류성룡은 속이려고 해도 속일수 없었다.》고 감탄하였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나자 도안의 백성들은 모두 달려와 통곡하면서 《류공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살아남지 못했을것이다.》고 하였던것이다.

류성룡은 통치계급의 한사람으로서 계급적제한성을 가지고있었지만 임진조국전쟁시기 군국지사를 도맡아안고 불타는 적개심으로 군대와 인민을 이끌어 강토를 수호하고 나아가서 아시아 여러 나라들을 타고앉으려던 왜놈들의 어리석은 망상을 짓부셔버리는데 기여한 정치군사가였다.

그는 1598년 12월 강화문제와 관련하여 북인들의 공격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나 1599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 그는 전쟁과정에 겪은 성공과 실패의 자취를 더듬어보면서 반성하고 교훈을 찾으려는 의미에서 《징비록》을 편찬하였다.

1604년에 그는 다시 복직되였으나 벼슬을 사양하였으며 1607년에 다시 부름을 받았으나 벼슬하지 않고 그해 5월 6일에 사망하였다. 그의 공로를 평가하여 문충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의 저서로 《징비록》과 《신종록》, 《영모록》 등이 전해진다. 

 

2. 《징비록》에 반영된 군사사상 

 

군사정치가로서의 류성룡의 면모는 그의 저서 《징비록》에 반영되여있다.

《징비록》은 임진조국전쟁시기 중앙정부의 수석대신이였던 류성룡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과정에 체험한 사실들을 중심으로 서술한 전쟁기록이다.

그는 이 책머리에 붙인 자기의 서문에서 《지난 일을 경계삼아 닥쳐올 일을 조심한다.》고 한 유교경전의 격언을 따서 자기의 집필목적을 표명하였다. 동시에 이 뜻으로 책이름까지 삼았으니 한마디로 이 전쟁으로부터 경험과 교훈을 찾아야 된다는것이였다.

《징비록》은 류성룡이 죽은 후 30여년이 지난 1643년경에 그의 후손들에 의하여 경상북도 안동에서 목판본으로 출판되였고 그후에도 여러차례 출판되였다.

《징비록》의 판본은 여러가지가 있으나 그 체계에 따라 두가지로 나눌수 있다. 하나는 16권으로 된 간본이고 다른 하나는 이 16권으로 된 책에서 《근폭집》, 《진사록》, 《군문등록》 등 문서집을 뽑아버리고 본문부분인 1~2권과 책의 마지막부분인 《록후잡기》 한편을 첨가하여 발간한 간략본이다.

일본침략자들을 반대하여 싸운 임진조국전쟁은 당시 나라의 운명과 관련된 큰 전쟁이였고 이 전쟁에 관한 사료로서는 《징비록》에 비길만 한 책이 없으므로 이 책은 류성룡의 문집인 《서애집》과 함께 국내외의 주목을 끌게 되였다. 하여 1695년 일본에서도 출판되였다. 한편 1930년대에 저자가 쓴 이 책의 초본이 발견되여 주체25(1936)년에 《초본징비록》이라는 이름으로 영인발간된 일이 있다.

《징비록》에는 그의 군사리론이 잘 반영되여있다.

그는 전쟁에서 장수의 역할을 중시하였다.

《군사란 일정한 정세가 없으며 전술이란 고정된 법이 없고 시기에 맞추어 사변에 대응하고 진공, 퇴각, 집합, 분산 등 한없이 기묘한 전술이 오직 장수 한사람에게 달렸을뿐인것이다. 그렇다면 천가지 만가지의 말과 계책은 다 쓸데없고 오직 장수로서의 자격자를 만나는데 있는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대체로 국가에서는 평화시기에 장수를 선택하고 전쟁시에 장수를 임명할것이요, 선택은 엄격하게, 임명은 책임제로 하는것이 중요한 문제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류성룡은 군사에서 명령지휘체계를 통일시키는 문제에 각별한 주의를 돌렸다.

그는 당시 명령지휘체계가 혼란된 사실에 대하여 《여러 도에는 순찰사가 있는데다가 또 감사가 있고 거기에 또 소모관이 있어서 명령이 일치하지 않으므로 어디에 복종해야 될지 알수 없게 되여있다.》고 개탄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군무를 처리하는데는 원칙이 있는바 첫째는 명령계통이 단일해야 하며 둘째는 상하부의 편제가 분명해야 하며 셋째는 상과 벌을 반드시 실시하는 문제》라고 하였다.

류성룡이 제승방략대신 진관제도를 다시 받아들이자고 한것이나 훈련도감을 창설하고 군대편제를 개선한것 등은 그의 이러한 견해로부터 출발한것이였다.

진관제는 지방군을 주진-거진-제진의 명령체계에 따라 동원하게 되여있는 제도였다. 진관제는 일정한 정도의 상비군을 확보하는 조건에서만 움직일수 있었다. 그리고 16세기중엽에 이르러 군적이 장부상으로만 있었지 실지 군인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진관제를 운영할수 없었다.

이리하여 림시방편으로 고안해낸것이 제승방략제였다. 이것은 진관제와 군적에 구애되지 않고 사변이 발생하면 긁어모을수 있는 모든 장정들을 모집하여 군대를 편성하고 그 고을의 원이 통솔하는것이 아니라 일부는 그 지방의 병마절도사에게 속하게 하고 일부는 서울에서 림시로 임명되여 파견되여가는 순변사, 방어사 등에게 소속되게 하는것이였다.

이 제도는 상비적인 전투대오와 고정된 지휘관이 통솔하는 경우와 같은 충분한 전투준비와 원만한 전투지휘를 보장할수 없었고 중앙에서 파견되여가는 지휘관이 도착하기를 기다려야 하였으므로 제때에 전투를 전개할수도 없는 본질적인 약점들을 가지고있었다.

정연한 통수체계와 명령체계가 없어진 지방군의 이러한 동원방법이 16세기후반기 전국적으로 보편화되였다.

류성룡은 제승방략제는 《일단 긴급한 일이 생기면 원근이 모두 함께 움직이며 장수없는 군대를 들판가운데 모아놓고 천리밖에서 오는 장수를 기다리게 하니 장수는 때에 맞추어 오지 않고 원쑤의 칼끝은 이미 림박하여 군사의 마음이 동요하니 패배하지 않을수 없는 동원체계》라고 비판하고 진관제를 복구할것을 주장하였다.

류성룡은 훈련도감을 창설함으로써 직업적인 상비군을 조직하고 고정된 장수에게 고정된 부하를 거느리게 하는 제도를 세워 군대의 전투력을 강화할수 있게 하였다.

류성룡은 적을 알고 자기를 알아야만 싸움에서 승리할수 있다는 립장을 견지하고있었다.

그는 적들의 우점은 무엇이고 약점은 무엇이며 그에 비한 아군의 약점과 우점을 구체적으로 분석한데 기초하여 전술적인 방안들을 제기하였다.

그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오래동안 평화롭게 지내다가 불의에 전란을 당하여 갈팡질팡하는 사이를 리용하여 적들이 파죽지세로 공격한것은 군사가들의 훌륭한 전술이고 적들의 교묘한 술책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적들이 늘 승리한 위력만 믿고서 뒤일을 생각지 않고 여러곳으로 갈라져서 침공한것은 잘못된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사방에서 일어나는 우리 인민들의 의병활동에 의하여 적들은 앞뒤가 서로 돕지 못하여 필경은 도망치지 않을수 없었다고 하였다.

적아간의 전투경험과 책략을 총화하면서 그는 장수다운 사람이 하나 있어 길게 뻗친 놈들의 전선을 토막내여 허리를 자르는 전술을 평양에서 실행했더라면 대병력을 앉아서 소멸할수 있었고 서울에서 썼다면 적들의 수레바퀴 한쪽도 남겨보내지 않았을것이라고 개탄하였다.

류성룡은 왜놈들의 전투방식을 연구한데 기초하여 놈들이 공격전에 능숙하고 무기가 우수하므로 아군이 넓은 들판에서 량군이 마주 대치하여 싸우는 법대로 한다면 대항하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그는 지리조건을 타산하여 험악한 산굽이든가 밀림이 우거진 지대를 차지하고 사수들을 군데군데 매복시켜 적들에게 보이지 않게 한 다음 량쪽에서 집중적으로 사격하면 놈들이 아무리 조총과 창, 칼을 가졌더라도 다 소용이 없게 되고 대승리를 거둘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실례를 들어가며 지형조건을 잘 리용하느냐 못하느냐 하는데 승패가 달려있다는것을 강조하였다.

이밖에도 그는 왜적을 막는데서 성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여러차례 강조하면서 특히 산성을 잘 꾸리고 청야전술을 잘 쓸데 대하여 제기하였다. 그리고 민심이 전쟁승패에 미치는 영향을 중시하고 농사를 장려하고 부역을 덜어주며 상벌제도를 공정하게 할데 대하여 제의하였다.

《징비록》에 반영된 그의 군사리론을 종합해보면 첫째는 인재를 중시해야 한다는것, 둘째는 명령지휘체계를 정연하게 세워야 한다는것, 셋째는 적아간의 력량관계, 전투방식을 잘 파악한데 기초하여 구체적인 전략전술을 세워야 한다는것, 넷째는 요해지를 장악해야 한다는것, 다섯째는 민심을 얻어야 한다는것이다.

이처럼 《징비록》은 저명한 군사정치가로서의 류성룡의 군사리론을 잘 보여주고있는 귀중한 문헌이다.

그러나 그 역시 량반지주이며 봉건관료의 한사람이였던것만큼 철저히 통치계급의 립장에서 또 봉건유교사상에 립각하여 인민대중의 애국투쟁을 왜소화하고 국왕이나 량반통치계급의 역할을 중시하는 등의 결함들도 발로시켰다. 그리고 자기의 힘보다도 외부의 원조에 큰 기대를 거는 사대사상에 혹심하게 물젖어있었다. 한편 그자신이 동인(남인)에 속해있었으므로 당파적편견에서 사물을 고찰하고 평가하는 결함도 범하였다.

비록 일련의 결함들도 범하였지만 전쟁의 운명을 걸머지고 정치, 군사, 외교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적지 않은 공적을 세운 류성룡은 단군민족사에 한페지를 차지할수 있을것이다.

  

 

           38)행주산성싸움을 승리에로 이끈 도원수 권률 

 

권률은 임진조국전쟁시기 오래동안 도원수(전시에 임명하던 수륙군의 총지휘관)의 중임을 맡아가지고 전쟁승리에 크게 기여한 명장중의 한사람이다. 그는 곽재우, 김응서와 함께 륙전에서 명성을 떨친 장수의 한사람으로 전해져왔다. 특히 그는 리치싸움과 행주산성싸움을 승리적으로 조직지휘함으로써 명장으로 력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권률(1537-1599년)은 안동사람으로서 선조초에 령의정을 지낸 권철(1503-1578년)의 아들이다. 그의 자는 언신이며 호는 만취당, 시호는 충장이다.

그는 재상가문의 출신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부귀와 권세를 부리는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공부를 좋아하였으나 나이 40살이 넘도록 과거를 보려 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음사(과거를 보지 않고 문벌로 벼슬하는것)로써 벼슬을 구해보라고 귀띔하였으나 웃기만 할뿐 응하지 않았다.

그러던중 1582년 나이가 46살이 되였을 때에야 명경과(유교경전의 뜻을 밝히게 하는 과거시험)에 합격되여 승문원 정자로 임명되여 벼슬길에 나서게 되였다. 그후 전적랑서로 승급하였고 1587년에는 전라도사, 그 다음해에는 례조좌랑, 호조 좌랑을 거쳐 경성부 판관으로 임명되였으며 1년후에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1591년 그의 나이 55살 되던 해에 조정에서는 그의 자질과 재능이 뛰여난것을 고려하여 의주목사로 임명하였다.

그후 1592년 4월 13일 임진조국전쟁이 일어나자 선조왕은 《내 일찌기 권률은 쓸만 한 인재라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에게 량남(호남 즉 전라도와 령남 즉 경상도)의 거진을 맡겨 적을 막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권률은 광주목사로 임명되였다.

권률은 임명을 받자 그날로 임지를 향해 출발하였다. 이때 그의 사위인 리항복(1556-1618년)이 승정원에서 일직을 서다가 장인에게 물었다.

《어째서 그다지 빨리 떠나려 하시오이까?》

그러자 권률은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라일이 이같이 급박하여 신하된 도리로는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때이다. 어찌 감히 한시각인들 지체하여 연약한 아녀자의 비겁한 태도를 취하겠는가.》

마디마디에 애국의 열의가 넘쳐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사람들은 진심으로 감탄하였다.

권률은 즉시 말에 올라 임지로 떠났다.

그가 전쟁형편을 료해하기도 전에 선조가 서울을 떠나며 각 도에 《속히 군사를 모아 와서 숙위하라!》고 내린 령이 이르렀다. 남도의 지방군들이 자기 지역을 수비하도록 하지 않고 국왕 한사람을 위해 서도로 오게 한것은 봉건정부의 반인민성, 부패무능을 그대로 보여주는것이였다.

선조왕의 령에 호응하여 전라도순찰사 리광과 방어사 곽영은 북상할것을 계획하고 곧 군사 4만명을 모았다. 리광은 그가운데서 2만명을 거느리고 라주목사 리경록을 중위장, 조방장 리지시를 선봉으로 삼았으며 곽영도 2만명을 거느리고 권률을 중위장, 조방장 백광언을 선봉으로 삼아 길을 나누어 진군하였다. 리광은 룡안에서 강을 건너 림천, 온양 등지를 거치고 곽영은 전주로부터 려산, 공주 등지를 지나 직산에서 만났다. 이때 경상도순찰사 김수와 충청도 순찰사 윤국형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합세하니 그 수는 5만명(6만명이라고도 한다.)이고 군사의 위용이 볼만 하였다. 이들은 함께 진군하여 수원에 진을 쳤다.

리광은 곽영에게 룡인의 유리한 지형에 먼저 진을 치고있는 적을 치게 하였다.

권률은 지형지물과 전국을 료해한데 기초하여 이렇게 제의하였다.

《적들은 이미 험한 곳에 의거하여 진을 쳤으므로 이를 올려다보며 치기는 어려운 형세이나이다. 지금 공은 경내를 소탕하고 들어가 도울 책임을 맡았으니 나라의 존망이 이번 출정에 달려있다고 할수 있소이다. 그러므로 모든 일을 신중하게 하여 만전을 도모해야 할것이니 지금 적과 싸우는것은 불가하옵니다. 마땅히 대군을 이끌고 바로 한강을 건너 림진강에서 적을 막으면 서쪽길은 저절로 견고해질것이고 군량길도 또한 통할것이라 그 형편에 따라 날랜 군사를 기르고 틈을 엿보며 조정의 명령을 기다려 움직이는것이 옳을것이옵니다.》

그의 제의는 당시의 형편에서 일정하게 타당성이 있는것이였다. 하지만 리광은 권률의 제의를 외면하였다. 그는 이미 본도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로 가다가 벌써 함락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싸워보지도 않고 전주로 물러간것으로 하여 비난을 받고있었다. 그래서 그는 마음이 조급해져 그때 어떻게 하나 대군을 거느린 기회에 《공》을 세워 명예를 회복해보려고 하였던것이다.

리광은 백광언이 지세를 살피고 돌아와 길이 좁고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서 쉽사리 진격할수 없다고 하였지만 성을 내며 진격하게 하였다. 곽영은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갔다.

권률은 1592년 5월 5일 적을 깔보며 일을 서두르는 백광언과 리지시에게 《적들의 형세를 잘 모르니 가볍게 전진하지 말고 중위군이 오는것을 기다려 함께 싸우는것이 좋을것이다.》라고 권고하였다.

권률의 충고를 듣지 않은것으로 하여 그들은 적의 보루 10여보쯤 되는 곳에까지 갔다가 패하여 물러섰다. 다음날 아침 적들은 증강된 력량으로 불의에 3도군사를 들이쳤다. 결국 3도군사들은 패하여 리광은 전라도로, 윤국형은 공주로, 김수는 경상우도로 뿔뿔이 흩어져 돌아갔다.

싸움이 실패한것은 전적으로 무능한 지휘관들때문이였다. 3도순찰사들은 모두 문관출신들이라 군무에 밝지 못하였으며 게다가 비겁쟁이들이였다. 결국 많은 군사를 가지고도 명령체계가 정연하지 못하고 적을 경시하였으며 요새에 의거하지 않고 무모하게 공격을 하려 한것으로 하여 패한것이다. 류성룡은 《이야말로 옛사람의 이른바 군대행군을 봄놀이하듯 한다는 격이였으니 어찌 패하지 않을수 있으랴.》고 개탄하였다. 만일 그때 권률의 권고를 받아들였다면 이런 비참한 패배를 맛보지는 않았을것이다.

룡인싸움의 쓰라린 상처를 가슴에 새기고 권률은 광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가만히 앉아 짓밟힌 강토, 쓰러진 겨레의 원한에 찬 울부짖음을 외면할수 없었다. 그는 분연히 팔을 걷고 나서며 이렇게 자기 심정을 토로하였다.

《종묘와 사직이 불타 재가 되여버리고 상감께옵서는 파천하였는데 신하된 도리로서 어찌 가만히 앉아 나라가 망하는것을 보고만 있을수 있으랴!》

그는 곧 관내에서 장정 500명을 모으고 린접한 군에 격문을 보내여 1,000여명의 군사를 얻었다. 그는 군사들을 거느리고 나아가 경상도와의 경계지점에 진을 쳤다.

이때 리광은 권률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이전에 자기가 그의 말을 듣지 않아 패한데 대하여 뉘우친바가 있었는지 그에게 곧 도절제사의 직책을 맡기고 여러 고을의 군사를 통솔하여 힘껏 싸우도록 하였다.

권률은 7월에 동복현감 황진의 부대와 련합하여 전략적요충지의 하나인 리치에 진을 쳤다.

조선분할통치계획에 따라 전라도를 담당하게 된 고바야까와 다까가게의 왜군 제6번대가 전라도로 침공하려면 로령산줄기의 웅치와 리치, 소백산줄기의 팔량치를 넘어야 하였다. 팔량치를 넘어 남원으로 가려던 적들은 의령 솥나루에서 곽재우의병대에 의하여 격퇴당하였고 륙십령을 넘어 진안으로 들어가려던 적의 한 부대는 거창, 안의로 가는 길목인 우척현에서 김면의병대에 의해 저지당하였다.

6번대놈들은 할수없이 추풍령으로 해서 소백산줄기를 넘어 충청도 영동을 돌아 전라도 무주, 금산으로 쳐들어갔다. 고바야까와놈은 부대를 둘로 나누어 하나는 안고꾸지 에께이에게 맡겨 룡담, 진안을 거쳐 웅치(곰치재)를 넘어 동쪽에서 전주를 공격하게 하고 제놈은 다른 한 부대를 거느리고 진산을 거쳐 리치(배티재)를 넘어 전주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금산을 떠난 적의 대군이 리치에 당도하자 권률은 황진 등과 힘을 합쳐 종일 적들과 격전을 벌렸다. 권률은 진지를 종횡으로 누비며 비겁한 병사들의 전립에 칼로 표식을 해두었다. 그리고 전투가 좀 즘해지면 이들을 불러내여 처벌함으로써 군률을 엄격하게 세웠다.

황진이 부상을 입고 물러서자 권률은 칼을 비껴들고 큰소리로 호령하며 진두에서 싸움을 지휘하였다. 그의 용맹한 모습에서 힘을 얻은 군사들은 분발하여 싸웠다.

적들은 크게 패하여 많은 시체와 병장기들을 내버린채 황급히 뺑소니를 쳤다. 이날 싸움에서 죽은 놈들의 시체에서 흐르는 피로 하여 초목들에서는 피비린내가 풍겼다고 한다. 왜적들도 《조선에서 세번 큰 싸움을 하였는데 리치싸움이 가장 컸다.》고 하였다.

이 리치싸움은 행주싸움, 한산도싸움, 진주싸움과 더불어 임진조국전쟁의 4대첩(4개의 큰 승리)중의 하나로서 력사에 유명하다.

적들은 리치싸움이후 더는 전라도지방으로 침범해들어갈수 없게 되였고 아군의 군량공급은 잠시도 중단되지 않게 되였다. 이러한 성과를 이룩함에 있어서 권률의 공로는 적지 않았던것이다.

리치싸움이후 권률은 라주목사로 되였다가 곧 전라도순찰사로 임명되였다. 그는 방어사에게 리치령을 대신 지키게 하고 곧 전주에 이르러 도안의 군사 1만여명을 모집하여 절반을 방어사에게 주고 절반을 거느리고 정부가 피난간 서도를 향해 진군하였다. 그러나 수도인 한성부근과 그 이북지역에는 일본침략군이 득실거리고있어 더 전진할수가 없었다. 이때 일본 고니시부대는 평양을, 구로다부대는 황해도를, 고바야까와는 개성을, 우게다는 한성(서울)을, 가또는 함경도를 차지하고있었다.

임금을 호위하기 위해 북상하던 여러 부대들도 모두 강화에 들어가 굳게 지키며 적의 예봉을 피하고있었다.

임진년도 다 저물어가던 섣달 어느 날 권률은 임금이 의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여러 장수들을 모아놓고 자기 계책을 말하였다.

《지금 평양 이남은 모두 적들이 점거하고있으므로 뚫고나가기가 어렵다. 한성은 나라의 근본이 되는 곳이니 먼저 이를 회복하여 고니시로 하여금 서쪽으로 진출할 뜻을 버리게 하면 모든 적들은 무기력하게 될것이다.》

이 계획은 적들의 배후에 끊임없는 위협을 조성하고 퇴로와 군량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적들의 북상을 저지시키고 퇴각을 촉진시키며 정부의 위험을 막아낼수 있게 하는 전략이였다.

권률은 자기의 작전계획에 따라 수원 독성으로 진격하였다.

권률의 작전안에 대하여 선조왕은 적극 지지하면서 보검까지 보내주었다. 그리고 《모든 장수들가운데 명령을 좇지 않는 자가 있으면 이 칼로 처결하라.》고 하였다.

이때 서울에 주둔하고있던 적장 우게다는 권률의 군세가 매우 정예한것을 꺼리여 군사 수만명을 오산을 비롯한 독성부근의 세곳에 배치하고 권률의 부대를 성밖으로 끌어내여 격파하려고 자주 도전을 걸어왔다.

권률은 적들의 약은 수를 꿰뚫어보고 적들을 최대한 피로케 하기 위한 소모전술을 썼다. 적들의 대군이 밀려들면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였고 적들이 물러가면 뒤따라가서 놈들의 약한 모퉁이를 치군 하였으며 날랜 군사들을 선발하여 적들이 향해가는 곳을 앞질러가서 그 선봉을 치고 돌아오게 하였다. 얼마후 기진맥진해진 적들은 밤에 병영을 불살라버리고 도망쳤다. 그리하여 경기도내에 퍼졌던 왜적들은 차례로 서울로 들어가버렸다. 이로부터 서쪽의 의주로 가는 길이 열리고 여러 고을들에서 의병이 떨쳐일어나 일시에 호응하게 되였다.

준엄하였던 시련의 해 1592년은 저물어가고 새해 1593년에 들어섰다. 새해에 들어서면서 전쟁형편에서는 결정적인 전환이 일어났다.

년초부터 아군의 드세찬 반격전이 개시되여 1월초 평양에서 쫓겨난 고니시도, 1월말과 2월초 림명과 백탑전투에서 많은 병력을 잃은 가또도 얼어드는 발들을 질질 끌며 서울로 밀려들었다. 고바야까와와 구로다 등 대장들도 서울에 몰켜들었다.

북으로부터는 아군이 파죽지세로 공격해오고있었다.

1593년 2월 권률은 수하 정병 4,000명을 나누어 전라병사 선거이에게 주어 병영을 금천에 두고 적을 누르게 하였으며 자신은 정예군사 2,300명을 거느리고 양천강을 건너 고양의 행주산성에 진을 쳤다. 그리고 조방장 조경에게 성을 수리하게 하고 서쪽길을 굳게 막아 한성을 수복하려고 하였다.

권률이 행주산성에 웅거하여 서울을 수복하려 한다는것을 알게 된 적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적들에게는 이것이 저들의 잔등에 박히는 비수같이 여겨졌다.

하지만 그의 군사수가 적다는것을 알게 되자 의기양양해져서 북에서 밀고 내려오는 조선군사들이 당도하기 전에 먼저 행주산성의 권률의 부대부터 치려고 하였다. 하여 우게다(4대)는 고니시 유끼나가(1대), 이시다 미쯔나리(2대), 구로다 나가마사(3대), 깃까와 히로이에(5대), 모리 모또야스(6대), 고바야까와 다까가게(7대) 등 제노라던 적장들을 거느리고 3만명의 침략군을 긁어모아가지고 행주산성으로 공격해왔다.

행주성산은 한강변에 솟은 야산으로서 그리 높지 않았지만 동, 서, 북 세면은 경사가 급하고 남쪽 한면은 강에 닿아있었다. 자그마한 산성은 남북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먼 옛날부터 군사적으로 중시되고있었다. 둘레 1km의 외성과 고지주변에는 내성이 축조되여있어 2중방어벽으로 되여있었다.

권률은 조방장 조경에게 성을 보수하고 목책을 둘러치게 하였다. 변이중은 자기의 재산을 내여 300대의 화차를 새로 창안제작하여 권률에게 넘겨주었다. 이 화차는 차체는 철판으로 쌌으며 수레에는 승자총통 40개가 설치되여있어 련발로 600발을 쏠수 있는 위력한 무기였다. 이밖에 총통을 비롯한 각종 화포와 화약도 충분히 마련해주었다.

2월 12일 적의 대군은 한성을 출발하여 홍제원으로부터 두패로 나뉘여 공격하여왔다.

권률은 군중에 경솔하게 움직이지 말라고 령을 내리고 상대에 올라 바라보았다. 적들은 벌써 5리쯤 되는 언덕우에 가득 밀려와있었다. 이윽고 기병 1만여명이 들을 덮으며 와서는 일시에 포위하여 덤벼들었다. 뒤미처 당도한 적의 보병도 악악대며 기여오르기 시작했다.

우리 군사들은 크고작은 승자총통과 진천뢰, 지신포, 대발화, 중발화 등 각종 화약무기들을 연방 쏘았다. 우리 군사들이 날리는 화살과 돌들이 놈들을 쓸어눕히였다.

첫 전투에서 패한 적들은 세개 편대로 나뉘여 엇바꾸어가면서 공격해왔다. 성을 지키는 우리 군사들을 피로케 한 다음에 점령해보자는 심산에서였다.

성안의 부녀자들도 싸움에 떨쳐나서 치마폭에 돌을 담아 날라다 줌으로써 싸우는 군인들을 적극 도와주고 크게 고무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행주치마》라고 부르는 녀성들의 앞치마이름도 이 행주산성싸움에서 생긴것이라고 전한다.

악착한 적들은 죽는 자가 꼬리를 물었으나 시체를 끌어내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적들은 이번에는 섶을 묶어 불을 달아 바람세를 타서 성책을 불태웠다. 우리 군사들은 물을 부어 불을 껐다. 이때 서북쪽을 지키던 승군이 조금 물러섰다. 권률은 검을 빼들고 싸움을 지휘하였다. 힘을 얻은 장수들이 결사적으로 싸워 적들을 내몰았다.

이렇게 되자 적들은 긴 나무로 높은 루차를 만들고 그속에 수십명의 조총수를 넣어 수백명이 메고 성가까이에 와서 총을 쏘아댔다.

권률은 포를 내다놓고 포전(포로 쏘는 화살)에 큰 칼을 달아매여 적의 루차를 쏘게 하였다. 칼 달린 화살들은 벽력같은 소리를 내며 날아가 루차를 파괴하였다. 그리고 그우의 적들은 사지와 몸뚱이가 갈기갈기 찢기여 날아떨어졌다.

화살이 떨어져갈무렵 경기수사 리빈이 강화도로부터 수만개의 화살을 배에 싣고 오자 장병들의 사기는 한층 고조되였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어두워질 때까지 적들은 8~9차례나 공격해왔으나 많은 주검만을 냈을뿐 성을 점령할수 없었다. 서울부근에 대기하고있던 아군부대들에 의하여 역포위에 빠질수 있다고 생각한 적들은 죽은 놈들의 시체를 네곳에 모아놓고 불태우고 황급히 도망쳤다. 이때 송장타는 냄새가 10리밖에까지 퍼졌다고 한다. 이 싸움에서 적의 총대장 우끼다 히데이에를 비롯하여 깃까와 히로이에, 이시다 미쯔나리, 마에노 나가야스 등 적장들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고 한다.

조방장 조경은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타격을 주었다.

다음날 아침 행주산성의 장병들은 전장을 수색하여 간밤에 적들이 미처 거두지 못한 시체 130여구를 거두어 목을 자르고 적이 버리고 간 수많은 군사장비를 로획하였다.

적들은 줄곧 행주싸움의 실패를 만회해보려고 대병을 이끌고 왔으나 성벽이 높고 군사들의 사기가 높은것을 보고는 한숨을 짓고 물러서군 하였다.

이 싸움이 바로 임진조국전쟁에서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는 전투들중의 하나로서 《행주대첩(행주큰승리)》으로 력사에 기록되여있다.

이 싸움을 승리적으로 결속하는데서 도순찰사 권률의 역할은 참으로 컸다. 이 전투에 참가하였던 고산현감 신경희는 임금에게 승전보고를 하면서 《권률이 직접 싸움을 독려하여 군사들을 진정시켰기때문에 군사들이 모두 죽기를 한하고 싸웠소이다. 장수가 만약 먼저 동요하였더라면 군사들이 모두 물에 빠져죽었을것이옵니다.》라고 말하였다.

행주산성전투후 명나라장수들은 《권률장군은 다른 장수와는 달리 조선에도 참된 장수가 있음을 외국인에게 믿게 하였다.》, 《왕국의 사직을 지탱한 충신》, 《중흥의 명장》이라고 칭찬을 마지 않았다.

누구든 권률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그가 행주대첩을 거둔 장수가 아니냐?》고 할 정도로 그의 이름은 행주대첩의 대명사로 되였다.

행주산성싸움의 대승리는 비록 적은 병력이라 하더라도 군민이 한덩어리가 되여 유리한 지형을 잘 리용하여 림기응변의 전술로 싸운다면 그 어떤 강적도 능히 쳐부실수 있다는 신심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서울에 몰켜든 적들에게 큰 타격을 주고 놈들의 퇴각을 촉진시켰으며 아군의 서울탈환을 위한 진격에 유리한 환경을 마련하였다.

그후 권률은 모래자루를 량식으로 가장하여 왜적을 유인해다가 섬멸하였다. 이것은 식량난에 허덕이는 적들의 심리를 리용한 전술로서 크게 성공하였고 명나라장수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그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파주산성으로 진을 옮기여 세차례에 걸치는 적의 공격을 물리치고 성을 사수하였다.

4월 18일에 적들이 한성에서 퇴각을 시작한 후 권률은 20일에 군사를 이끌고 제일먼저 수도로 진입하였다. 이어 그는 적을 추격하여 남쪽으로 진격하였다. 한강을 건너 추격전을 벌리려는데 뒤따라온 명나라군 유격장 척금이 가로막아나섰다. 명나라제독 리여송의 명령없이는 추격하지 말라는것이였다. 도대체 도망치는 적을 추격소멸하지 말라니 어떻게 된 일인가. 군사들의 불만과 의혹은 커갔다.

궁지에 몰린 적들은 명나라제독 리여송에게 화의를 청하며 추격을 모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조선군의 군국사무를 총괄하던 도체찰사 류성룡은 명나라군제독 리여송에게 추격을 강하게 요구하며 한편으로 전라도순찰사 권률, 순변사 리빈, 경기도방어사 고언백 등 여러 장수들을 불러 추격을 명령하였다.

그런데 왜놈들과 강화담판을 벌려놓고 퇴로까지 열어준 명나라군 경략 송응창과 제독 리여송은 우리 군대의 추격까지 가로막아나섰다. 리여송은 《권률은 잘 싸우는 장수다. 만약 그가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추격한다면 결국 큰 싸움이 벌어져 우리가 도모하는 화의는 와해되고말것이니 이를 막아야 하겠다.》고 하면서 밤에 가만히 척금을 시켜 한강의 나루배를 다 거두어 군사들이 건늘수 없게 만들고 또 제 마음대로 추격을 조직하였다고 지어 나무람까지 한것이다.

권률은 몹시 분개하였으나 두 나라사이의 관계를 고려하여 참고 군사를 돌리였다.

6월에 권률은 무능한 김명원대신 전선을 총 책임진 도원수로 임명되였다.

전쟁이 일시적으로 휴전기에 들어간 후 권률은 1595년 7월에 해임되였다가 다시 한성판윤, 호조판서, 충청도관찰사 등을 력임하였으며 1596년 1월에 도원수로 다시 임명되였다.

권률은 앞으로 적이 다시 침범할것이라고 예견하고 경계하면서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였다.

그후 권률은 1597년 2월 강화담판의 막뒤에서 침략준비를 해오던 왜적들이 다시 수십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쳐들어오자 도체찰사 류성룡과 협동하여 조선군사를 지휘하여 최후의 승리를 이룩하는데 기여하였다.

임진조국전쟁이 우리 인민의 승리로 끝난 다음해인 1599년 7월 그는 병으로 죽었다. 그때 나이는 63살이였다. 봉건정부에서는 그의 군공을 평가하여 공신칭호와 함께 령의정벼슬을 증직(죽은 후에 명예벼슬을 주는것)하였다.

임진조국전쟁을 승리적으로 결속하는데 기여한 장수의 한사람으로서 그는 후세사람들에게 본보기로 될만 한 투쟁경험들을 남겼다.

그는 언제나 앞장에서 대오를 지휘하였으며 조금도 주저하거나 동요하는 빛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장병들이 신심을 가지고 전투에 림하도록 하였다.

그는 적과의 싸움에서 지형지물을 잘 리용하는것이 중요하다는것을 잘 알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써먹는데 깊은 관심을 돌렸다. 리치싸움이나 행주산성싸움 등은 다 유리한 지형조건을 리용하여 적을 물리친 대표적인 전투들이였다.

권률은 군사를 적용하는데서 언제나 사사를 두지 않고 엄격히 법대로만 하였다. 이것은 군사들이 호령에 따라 일치하게 움직이게 하는데서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한 무관이 싸움터에 나가기를 꺼려하면서 전주에 숨어서 명나라장수 송대빈에게 의지하고있었다. 권률은 전주에 와서 이 사실을 알고 당장 끌어내도록 하였다. 송대빈은 그를 살려주자고 애걸했다. 여느 장수 같으면 명나라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살려주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권률은 그 청을 뿌리치고 군률에 따라 처형하였다.

그후 처형된 자의 가족들이 정부의 요직을 지내던 윤두수에게 그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였다고 고소하였다. 권률의 공로를 시기하던 자들이 이를 좋은 기회로 여기고 그를 헐뜯기 시작했다. 그가 한때 도원수직에서 물러나게 된데는 이런 사정도 깔려있었다.

권률은 인재를 중시하고 잘 쓴 군사가이기도 하였다. 그의 군사적공적에서 가장 큰것의 하나로 일러주는 행주대승리와 관련하여 이런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가 군사 2,300명을 거느리고 양천강변에 이르렀을 때 인천 어느 한 촌에 산다는 서생이 그를 만나자고 하여 이런 의견을 제기하였다. 《용병하는 방도는 반드시 지리를 얻어야만 할줄 아나이다. 군대를 주둔할만 한 높은 언덕이 한곳 있으니 그야말로 병법에서 말하는 구지(적이 모를 깊은 곳)에 군대를 감추고 구천(가장 높은 곳)에서 행동할수 있는 곳이오이다. 부디 장군께서 몸소 살피시와 그 가부를 결정하소서.》

그리하여 권률은 그가 소개한 곳을 가보았다. 권률은 지리를 중시하고 또 어지간히 지형을 볼줄 아는 사람이였던지라 그곳이 진지로서 적합하다고 보고 그곳을 진지로 정하였다. 그곳이 바로 행주였다.

그 서생은 권률이 대적과 대결하였는데 적을 방어할 시설이 없는것을 우려하자 자신이 책임지고 훌륭한 방어시설을 꾸려놓았다.

적들과의 가렬처절한 싸움때 림기응변한 전법들도 많은 경우 그 서생이 고안해낸것이다.

패배하고 돌아간 적들이 성안의 장수들을 죽이려고 꾸민 모략도 서생에 의하여 적발되여 엄중한 위험이 미연에 방지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권률의 군사적성공이 그가 인재를 중시하고 군중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들의 슬기와 재능을 남김없이 발양시킨데 있었다는것을 잘 보여주고있다.

권률은 통치계급의 한 성원으로서 계급적제한성을 가지고있었고 또 군사가로서도 일련의 결함들을 범하였다.

행주산성싸움에서 크게 승리하여 명성을 얻게 된 권률은 자만자족하면서 독선적이며 주관적인 행동들도 하게 되였다.

비록 일련의 결함들을 범하였지만 헌신적인 전투지휘로 명성을 떨친 그의 공적은 가리울수 없다. 일개 서생에 불과한 그가 의기를 떨쳐 리치와 행주성에서 거둔 대승리는 전쟁국면을 역전시키고 적의 배후를 견제하며 승리를 앞당기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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