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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과 인민의 기억속에 영생하는 통일애국투사:프레스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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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과 인민의 기억속에 영생하는 통일애국투사

프레스아리랑 | 기사입력 2024/03/27 [19:46]

조국과 인민의 기억속에 영생하는 통일애국투사

프레스아리랑 | 입력 : 2024/03/27 [19:46]

조국과 인민의 기억속에 영생하는 통일애국투사 

 

 

 

공화국의 수도 평양의 통일거리에는 신념과 의지의 전형인 리인모동지의 반신상이 있다.

 

 

 



 

 

 

조국통일상 금메달이 부각되여있는 화강석대돌우에 34년간의 옥중고초가 슴배여있는 수인복차림으로 철쇄에 묶인 두주먹을 억세게 틀어쥐고있는 리인모동지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떠나간 혁명전사에게 가장 값높은 영생의 삶을 안겨주신 절세위인들의 한없이 뜨거운 동지애의 세계를 가슴뜨겁게 받아안으며 절해고도에서도 변심없이 혁명적지조를 지켜 견결히 싸운 통일애국투사의 불굴의 삶에 대하여 돌이켜보군 한다.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종군기자로 활동하면서 인민군군인들과 인민들을 영웅적투쟁과 위훈에로 고무추동하던 리인모동지는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지리산인민유격대에서 용감히 싸우다가 불행하게도 19521월 총상을 입고 적들에게 체포되게 되였다. 그때부터 그의 옥중생활이 시작되였다.

 

이때 그에게는 전향문을 쓰고 나가느냐 아니면 모진 옥중고초를 이겨내며 신념과 지조를 지키느냐 하는 두 길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추악한 변절이고 배신인 전향을 거부하고 감옥에 남는 길을 서슴없이 택하였다.

 

리인모동지의 기나긴 옥중생활을 어찌 글로 다 옮길수 있으랴.

 

그가 갇혀있은 감방은 손으로 재여 너비 다섯뽐반, 길이 열세뽐짜리 해빛 한줄기 스며들지 않는 먹방이였다. 교형리들은 그를 이런 캄캄한 독감방에 가두어넣고 전향 안한 빨갱이들은 영원히 해빛을 못 보게 해야 한다.고 떠벌이며 뼈가 부서지고 살점이 짓이겨지는 야수적고문을 가하였다. 추운 겨울날 옷을 벗긴 알몸에 얼음같은 랭수를 퍼붓고 꽁꽁 묶어 공중에 매달아 두들겨패는 고문, 고문대에 묶어놓고 코에다 물을 부어넣는 고문, 무리로 달려들어 몽둥이로 사정없이 때리는 고문

 

사람들이여, 잠시라도 자신을 그의 한생이 흘러간 그 캄캄하고 비좁은 독감방에 세워보라. 그리고 해볕을 받고 땅을 밟을 권리마저 빼앗긴채 갖은 악형으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숨쉬는 화석의 고통을 되새겨보라. 그러면 그 모진 고초를 과연 무슨 힘으로 이겨낼수 있었는가 하는 물음이 저절로 생겨날것이다.

 

서울형무소를 거쳐 대전형무소로, 거기에서 다시 광주형무소, 부산형무소로 이송되며 34, 날자로만 세여도 그것은 12 400여일에 달한다.

 

매일같이 가해지는 중세기적인 고문과 갖은 회유기만, 비렬한 모략과 끈질긴 위협공갈속에 참기 어려운 배고픔과 추위가 엄습하는 감옥생활은 이루 형언할수 없이 처절한것이였다.

 

그렇다면 리인모동지는 타고난 신념의 강자였던가?

 

아니다. 그도 인간으로서 소중한 꿈이 있었다. 또 삶에 대한 애착과 행복에 대한 지향은 누구보다도 강렬하였다.

 

하다면 그토록 강직한 그의 신념과 의지는 과연 어떻게 싹트고 자라난것인가.

 

일제식민지통치의 암담한 시기 그는 량강도 김형권군의 가난한 화전농의 가정에서 태여나 나라잃은 망국노의 설음이 무엇인가를 뼈에 사무치게 체험하며 자랐다.

 

개마고원의 궁벽한 벽촌에 파묻혀있던 10대의 어린 가슴에 커다란 충격을 준것은 19308월에 불요불굴의 혁명투사 김형권선생님께서 울리신 파발리의 총성이였다. 이것은 일본도를 차고 거들먹거리는 왜놈들만 보면 증오심이 불같았으나 어떻게 울분을 터칠지 몰라 모대기던 그의 가슴에 비껴든 한줄기의 서광이였다.

 

조선민족은 싸우고있다. 가자, 조국해방을 위해 싸우시는 김일성장군님의 항일무장부대를 찾아가자.

 

이렇게 되여 그는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을 찾아 온 동북땅을 찾아헤매였다. 그때로부터 몇해가 지난 19376월 력사적인 보천보전투소식은 리인모동지의 가슴속에 민족구원의 위대한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존경과 흠모심이 더욱 끓어번지게 하였다.

 

바로 이러한 때 리인모동지는 뜻밖에도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를 만나뵙게 되였다. 김정숙어머님의 손길을 따라 혁명의 진리를 깨닫고 투쟁의 길에 나선 리인모동지는 조국광복회 풍산지구혁명위원회 서부지구 책임자로 활동하면서 김일성장군님의 전민항쟁로선을 관철하기 위하여 헌신적으로 싸웠다.

 

그 나날은 리인모동지의 가슴속에 싹트고 자란 혁명적신념과 의지가 억센 줄기로 성장한 잊지 못할 나날들이였다.

 

리인모동지는 백두산절세위인들을 따르며 자래운 신념을 위대한 우리 당만을 믿으며 억척같이 굳혔다. 하기에 그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영광스러운 우리 당을 창건하신 그해에 수령님과 당을 한생토록 받드는 혁명의 전위투사가 될 굳은 결심을 안고 당에 들었으며 새 조국건설을 위해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쳐 투쟁하였다.

 

이렇게 성장한 리인모동지였기에 육체와 정신을 사정없이 파고드는 극도의 고통속에서도 그의 심장은 언제나 당원증을 가슴에 품고 한생을 수령의 전사로 충직하게 살며 싸울것을 다짐한 그 맹세, 조선로동당의 당원이라는 자각으로 맥박쳤다.

 

(내가 아무리 고통스럽다 해도 항일의 혈전만리길에서 겪으신 우리 수령님의 풍상고초에 어찌 비길수 있겠는가. 그리고 당원의 량심과 두고온 고향, 사랑하는 부모처자를 어찌 배신할수 있겠는가.

 

리인모동지의 뇌리에는 항상 이 생각만이 고패쳤다고 한다.

 

바로 위대한 수령님과 당앞에 다진 맹세, 풍산에서 김정숙어머님으로부터 받은 각별한 믿음과 사랑, 조국에 대한 열렬한 사랑이 세인을 놀래운 그의 완강한 신념과 의지의 버팀목이였던것이다.

 

 

 

꽃다운 청춘시절을 철창속에서 다 보내고 70고령의 나이에 출옥한 리인모동지는 장기간의 감옥살이로 페인이 되고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이 조선로동당의 한 성원이라는것만은 한시도 잊지 않았다.

 

하여 신념을 지키는 싸움은 감옥밖에서도 계속되였다.

 

지리산에서, 철창속에서 조국통일 만세!》를 웨치며 싸운 동지들의 투쟁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는것을 조선인민군 종군기자의 임무를 다하는것으로 여긴 그는 기억들을 하나하나 더듬어 수기들을 쓰면서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어머니조국은 당과 수령, 조국과 혁명에 충실한 아들을 수십년세월 어느 한시도 잊지 않고있었다.

 

위대한 김정일대원수님께서는 남조선에서 옥중고초를 겪으면서도 끝까지 지조를 지킨 그를 신념과 의지의 강자로 높이 내세워주시며 조국의 품으로 데려오기 위해 각 방면에 걸쳐 적극적인 투쟁을 벌리도록 은정어린 조치도 취해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한없이 뜨거운 동지적사랑은 마침내 분계선 빗장을 열어젖히고 한 전사가 지옥행으로부터 락원행으로 인생전환의 궤도에 오르는 력사의 기적을 안아왔으니 주체82(1993)319일 리인모동지는 드디여 그립고그리운 어머니조국의 품에 안기게 되였다.

 

조국의 품에 안긴 리인모동지가 위대한 대원수님들로부터 받아안은 사랑은 또 얼마나 큰것이였던가.

 

주체82(1993)415, 만민의 축복을 받으셔야 할 뜻깊은 생신날 아침에 친히 리인모동지를 찾아 병원에 오신 위대한 김일성대원수님께서는 그의 두손을 꼭 잡으시고 동무는 원쑤들의 고문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혁명적지조와 절개를 지켜 용감히 싸움으로써 조선로동당원의 고결한 혁명정신과 숭고한 풍모를 온 세상에 과시하였다고 크나큰 사랑과 믿음의 말씀을 주시였다. 그러시면서 몸소 수표하신 당원증도 안겨주시고 자신의 존함이 새겨져있는 금시계도 채워주시였다.

 

그리고 크나큰 격정에 눈굽을 적시는 그의 부인과 딸에게도 친히 자신의 존함이 새겨진 금시계를 안겨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수십년세월 남편을 기다려 녀성의 지조를 지켜낸 동무도 영웅이라고 값높은 영광을 안겨주시면서 그들부부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리인모동지에게 신념과 의지의 화신이라는 고귀한 칭호와 함께 공화국2중영웅칭호, 공화국의 최고훈장인 김일성훈장, 조국통일상을 비롯한 높은 국가표창을 안겨주시여 그의 삶을 값높이 내세워주시였다.

 




또한 사랑하는 전사가 생을 마쳤을 때에는 몸소 화환도 보내주시고 인민장이라는 새로운 장의형식을 내오도록 특별조치까지 취해주시였으며 평양의 통일거리에 반신동상까지 세워주도록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였다.

 

얼마전 위대한 대원수님들의 천품을 그대로 지니시고 동지애로 시작되고 동지애로 승리하는 우리 혁명의 자랑스러운 력사를 줄기차게 이어가시는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께서는 선군혁명령도의 그처럼 바쁘신 속에서도 리인모동지를 다시금 회고하시며 그를 신념과 의지의 전형으로 높이 내세워주시고 온 나라가 그의 정신세계를 따라배우도록 해주시였다.

 

정녕 위대한 대원수님들과 경애하는 원수님은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해 모든것을 다 바친 혁명전사들을 언제나 잊지 않으시고 그들의 한생을 영원히 빛내여주시는 위대한 삶의 은인, 혁명적동지애의 최고화신이시다.

 

리인모동지의 삶과 투쟁은 우리 인민들모두에게 죽어도 혁명신념을 버리지 말라, 그러면 최후승리자가 되고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의 기억속에 영생한다는 고귀한 인생철리를 가르쳐주고 있다.

 

※ 이 글은 2015318조선의 오늘에 연재된 내용이다.

 

 

 



 

리인모

 

(1917. 8. 24- 2007. 6. 16) 종군기자

 

 

 

1930812살때 불요불굴의 혁명투사 김형권동지께서 인솔하신 조선혁명군 무장소조의 파발리 내중경찰관주재소습격사건을 직접 목격하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으며 김형권동지의 격동적인 연설을 들으면서 반일투쟁에 나설 결심을 다지였다. 19318월 파발리에서 조직된 적색독서회에 망라되여 소년부책임자로 활동하였으며 1932년과 1933년에 적색독서회사건으로 두차례에 걸쳐 일제경찰에 체포되여 약 1년간의 감옥생활을 하였다.

 

그후 여러 지역에서 로동하면서 항일유격대를 찾기 위해 모색하는 한편 동지들을 규합하고 혁명조직을 내오기 위한 투쟁을 벌리였다. 19377월과 19389월에 풍산군(오늘의 김형권군) 파발리와 리포리에서 국내에 나와 활동하시던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를 만나뵙고 조국광복회조직을 확대강화하며 적구에서의 활동을 령활하게 벌릴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받았다.

 

19387월부터 19408월 기간에는 조국광복회 풍산지구혁명위원회 성원으로서 파발리분회와 황수원언제로동자돌격대, 안산후치령생산유격대 등의 조직들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였으며 19408월부터 194012월 기간에는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가지고 일본 도꾜에 건너가 풍산출신의 고학생들로 조직된 풍우동경고학생친목회를 혁명적으로 개편하였다.

 

그후 조선인민혁명군의 주요 공작대상의 하나였던 서울콩그룹에 조국광복회로선을 전달하고 서울의 운동권에 영향을 주었으며 서울지구의 금속, 방직, 섬유, 인쇄, 염색, 피복 등 여러 부문의 로동자들속에 깊이 들어가 로동계급의 선진분자들로 로조조직을 꾸리고 전민항쟁준비를 위한 기틀을 마련하는 사업에 적극 참가하였다. 19416월부터 풍산지구에서 전민항쟁준비사업을 하다가 8. 15해방을 맞이하였다.

 

1945년에 북조선공산당에 입당한 후 풍산군 안산면당 위원장, 풍산군당 선전부장을 거쳐 흥남시당 선전부장으로 사업하였으며 미제가 침략전쟁을 도발한 후에는 조선인민군 종군기자로서 락동강계선까지 나가 활동하였다. 195010월 전략상 일시적후퇴시기 지리산유격대에 들어가 피어린 적후투쟁을 벌리다가 19521월 총상을 입고 적들에게 체포되였다.

 

광주포로수용소와 형무소를 거쳐 대전, 대구, 마포, 부산, 서울, 청주 등의 형무소로 옮겨지면서 34년간의 옥고를 치르는동안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을 언제나 마음의 기둥으로 삼고 그이의 전사답게 조선로동당원의 고귀한 칭호를 빛내이며 원쑤들의 온갖 유혹과 고문, 악형, 전향강요책동에도 굴하지 않았다. 198810월에 페인의 몸으로 석방된 후에도 지리산빨찌산의 투쟁을 소개한 수기를 써서 남조선의 한 출판물에 게재함으로써 놈들의 가혹성과 야만성, 반동적인 남조선사회상을 온 민족과 세계의 량심앞에 고발하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투철한 애국의지와 통일의 신념을 안고 변심없이 한생을 바쳐 싸운 불굴의 인간 리인모의 소식을 들으시고 그를 신념과 의지의 화신이라고 불러주시며 하루빨리 그를 사회주의조국의 품으로 송환해오도록 온갖 조치를 다 취해주시였다. 위대한 대원수님들의 현명한 령도와 크나큰 사랑과 은정에 의하여 그는 1993319일 군사분계선을 넘어 사회주의조국의 품에 안겼으며 빠른 시일동안에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다.

 

1993415일에는 병원에 찾아오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만나뵙고 기념사진까지 찍는 최상의 영광을 지녔으며 입당당시의 당원증번호가 새겨지고 위대한 수령님께서 친히 수표하신 조선로동당 당원증을 받았다. 또한 전승 40돐에 즈음하여 진행된 전국로병대회와 1994년 새해 설맞이공연에 참가하여 또다시 위대한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의 접견을 받는 영광을 지니였다. 위대한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께서는 리인모를 조국의 장한 아들로 내세워주시며 그에게 안겨주실수 있는 모든 영광과 은정을 다 돌려주시였다.

 

날과 달이 갈수록 더해만지는 뜨거운 어버이사랑과 크나큰 은덕을 받아안은 그는 위대한 수령, 위대한 령도자를 모신 전사의 행복이 무엇인가를 깊이 깨닫게 되였으며 위대한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께서 계시여 조국이 있고 자신의 가정도 있다는것을 절감하고 감사의 편지를 여러차례에 걸쳐 올리고 헌시 나의 운명을 두고, 사랑에 대한 생각, 신념과 의지의 찬가와 가사 당신만 있으면 우리는 이긴다도 써서 드리였다. 또한 당보 로동신문에 기사 우리는 수령복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 당복이 차넘칩니다우리 민족의 대행운은 장군복입니다, 우리는 태양복에 삽니다등을 집필하여 발표하였고 장편회상록 신념과 나의 한생(1996)을 써서 출판하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은정에 의하여 그가 공부하던 파발소학교가 리인모소학교로 명명되고 거기에 위대한 장군님의 친필비가 세워졌다. 공화국2중영웅칭호(1990, 1997)와 영예의 김일성훈장(1993), 3. 1월간상(1993), 조국해방전쟁승리 40돐기념훈장(1993)을 비롯한 높은 국가표창과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2008723일 평양의 통일거리에 조국통일상 금메달이 부각되여있는 화강석대돌우에 34년간의 옥중고초가 슴배여있는 수인복차림으로 철쇄에 묶인 두주먹을 억세게 틀어쥐고있는 모습을 형상한 반신동상이 건립되였다. 묘는 애국렬사릉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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