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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골 할배
김문보
비 오는 날은 우리 할배 쉬시는 날 그 날은 우리 할배 책 읽으시는 날 심청뎐 구운몽 옥당춘뎐 춘향뎐...
할배 방 실겅에 한글 딱지본 고전이 수북했다 한 권 골라내어 소리내어 읽으신다 낭랑한 글 읽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겨울 긴 밤엔 그 책 한 권 들고 동네 할매들 모이는 소동 할매집을 찾았다
우리 할배, 글 모르는 할매들 빙 둘러앉은 방 복판에 앉아 목청껏 옥당춘뎐을 읽으셨다
* "오늘은 요기까지..." 갑자기 읽기를 멈춘다 할매들이 애가 달아 구판장에 가신다
노란 알루미늄 두 되짜리 주전자에 막걸리가 찰랑댔다 깊이 묻은 김장김치 동치미도 나왔다
할배께선 한 대목을 더 읽어내리신다 목침 베고 누운 할매, 벽에 기댄 할매 할매들이 울었다 웃었다를 반복했다
호롱불 밑 그 겨울밤 우리 할배는 동네 새모테 골목이 낭창하도록 할매들한테 책 읽어주는 남자였다
-------------------------------------------- * 토골 할배 : 우리 할배 택호. * 소동 할매 : 권씨 일가집 할매 택호. * 실겅 : 방 천정 밑을 가로지른 선반. * 새모테 : 소동댁이 있는 동네 골목. 동네 안에서 비교적 늦게 형성된 골목이라 '새모퉁이'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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